팔레스타인의 고립을 풀 열쇠, 자유와 평등

글로컬 오디세이

정진한

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이스라엘은 무슬림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으로 탄생한 나라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이천년을 유럽 땅에

서 떠돌며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고립되고 차별받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어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억압당하지 않을 자유를 찾고자 분투했던 노력의 최종 정착지이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로부터 고립된 채 살아온 팔레스타인인들은 “왜 우리가 유대인들이 겪은 역사적 피해의 희생양이 돼야 하냐”라고 호소한다.

최근 급속도로 진척된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연쇄 수교는 애초부터 우려스러웠다. 1948년 건국을 선포한 이후 이스라엘은 거듭된 전면전 끝에 1979년 이집트와, 1994년 요르단과 수교할 수 있었지만 이후 26년간 20개 아랍국의 외면을 받았다. 하지만 2020년 8월부터 불과 넉달 만에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모로코, 수단과 관계를 정상화했고, 이에 아랍을 비롯한 이

슬람권 전체의 민심은 동요했다.

논란의 핵심은 역시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독립과 주권의 인정이었다. 수교가 한창이던 2020년 11월 아랍 센터 워싱턴 DC 조사에서 아랍인 88%는 자국의 이스라엘 인정을 반대했고 겨우 6%만이 수용했다. 이 수치는 알제리나 예멘처럼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뿐 아니라 이집트와 요르단처럼 기수교국들을 포함했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이들 다수는 심적으로 이스라엘 땅 전체를 팔레스타인인들의 몫이라고 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을 독립국으로 인정할 테니 팔레스타인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고립과 팔레스타인의 지지라는 아랍의 연대는 2020년 이후 가시적으로 급속히 해체됐다. 팔레스타인은 이를 격렬하게 성토했고 특히 하마스는 수차례 공습을 가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처우를 개선해야만 하는 동인은 약해져 갔다. 분리 장벽과 아이언 돔 요격 시스템으로 방어력을 입증했고, 일부 아랍과의 관계도 개선했다. 특히 트럼프의 이란 고립정책은 아랍 국가들로 하여금 이스라엘과의 반이란 연대를 추진케했고, 이로써 이스라엘의 입지는 한 번 더 높아졌다.

결국 팔레스타인 내부에서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은 최고조에 달했고, 대규모 전면전을 제외

한 선택지는 사라져갔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서는 유엔이 불법으로 지정한 정착촌이 지속적으로 확장됐지만, 이에 대한 팔레스타인 정부에 대한 대처는 무기력했다. 가자 지구에서 산발적 공습을 전개했지만 심대한 위협을 끼치지 못했다. 단지 본토와 양 점령지 모두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테러 빈도가 급증했고 공습과 시위의 정도가 격렬해졌다.

마침내 하마스는 자기 파괴적인 총력전을 감행했다. 과감하고 입체적인 공세는 공습과 지상전에서 모두 전례 없는 전과를 획득했지만 무차별적인 민간인 납치로 도덕적 정당성을 무너뜨렸다. 또한 이스라엘의 총력 지상전으로 전국토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고 궤멸적인 시설 파괴를 입었다.

그럼에도 하마스의 이 위험한 결정은 거시적 관점에서 큰 변화를 야기했다. 먼저 팔레스타인 문제를 방치하거나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존립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 완성체로 자부해온 자국의 방어선이 전방위적으로 뚫리는 것을 전 세계가 목도했고, 이미 심각했던 안보 유지 부담이 폭증하고 있다.

뜨겁게 언론을 달군 유대인들의 영웅적인 귀국 뒤에는 병역 부담으로 인해 꾸준히 증가해온 이스라엘의 인구 유출이 있다. 징집을 피하려 많은 여성과 그 가족들은 이민을 택했고, 일부 남성

하마스의 자기 파괴적인 총력전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방치하거나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존립이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진은 한국 이스라엘 대사관 인근에서 진행한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사진제공=정진한

들은 과거에 징집에서 면제됐던 하레디(초정통파 유대인)로 개종했다. 민과 군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 전쟁은 일부에게 애국심을 고취했지만, 다른 이들이 정부가 팔레스타인과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을 요구하거나 이스라엘을 떠나게 할 것이다.

전쟁은 추가적인 아랍과의 수교를 중단시켰다. 이미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수교는 요원해졌다. 이번 전쟁 직전 (아랍 청년 설문조사 Arab Youth Survey)는 사우디 청년의 98%가 이팔문제 해결 없는 이스라엘과의 수교에 부정적, 그 중 대다수는 강하게 부정적이라고 발표했다. 과거 국내 급진파들의 메카 대성원 점령, 911테러 주동 등을 겪은 사우디는 이팔 문제의 폭발력을 잘 알고 있다. 이 전쟁은 불가능에 가깝던 수교 노정에서 사우디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출구가 됐다.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여론 역시 악화되고 있다. 10개의 비아랍계 이슬람 국가는 이스

라엘과의 국교를 거부 중이고 그중 6개국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왔다. 아랍과의 데탕트(긴장 완화)를 발판으로 이스라엘이 시도하던 이슬람권과의 관계 개선 역시 힘들어졌다.

심지어 유대인을 축출한 역사적 부채로 인해 여지껏 이스라엘을 지지해온 유럽의 여론마저 찬반 양분 양상으로 돌아섰다. 과거 유럽 내 유대인들이 겪었던 고립을 오늘날 반복해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스라엘이 이제는 억압 대신 수 천 년간 꿈꿔왔던 평등과 자유를 팔레스타인에서 실현해 내길 기도해 본다.

요르단대와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문명교류사와 중동학을 전공했고 한국이슬람학회 편집이사를 맡고 있다. 「이슬람 세계관 속 신라의 역사: 알 마스우디의 창세기부터 각 민족의 기원을 중심으로」 등 논문을 썼다.

대학 국제화 20년, 학생의 ‘학습’에 주목하다

대학 국제화의 메가 트렌드

고등교육 국제화 연구 키워드

학생·지속가능성·질관리·대학 역할에 주목

국내 고등교육에서 ‘국제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20여 년이 흘렀다. 여전히 글로벌 대학 경쟁력 강화는 중요한 화두다. 최근에는 원격·가상·뉴노멀 등 새로운 차원의 ‘탈경계화’가 진행 중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많은 대학이 디지털 기반의 ‘국제화’를 최우선 정책 의제로 삼아 전략적 이니셔티브와 준거를 설정하고 있다. 필자는 ‘고등교육 국제화 연구’의 큰 흐름을 텍스트마이닝으로 분석해 큰 틀에서 동향을 살폈다.

우선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에서 ‘higher education’을 키워드로 산출한 약 1만2천 건의 결과를 두고, 결과 내 검색 기능을 활용해 (1) international (2)global로 각각 검색해 산출된 데이터를 전수 조사했다. 이를 위해 파이썬으로 논문 제목과 키워드를 크롤링했으며, 수집된

자료로 텍스트 빈도 분석 및 시각화 작업을 했다. 또한 고등교육 국제화 현상은 대체로 2000년대 이후에 본격화됐으므로, 2003년부터 2022년까지 20년을 범위로 설정했다. 해당 기간을 1기(2003~2012년)와 2기(2013~2022년)로 구분해 기간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텍스트 빈도 분석 결과, 국제화 동향 연구도 고등교육 연구 일반적 속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Student’, ‘Learning’, ‘Study’, ‘Development’와 같은 학생의 학습활동 관련 키워드가 가장 많았다. 이는 ‘고등교육’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학습자 중심, 학생 개발, 배움 등의 특징이 국제화 연구에도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1기와 2기 모두 ‘Student’와 ‘Learning’이라는 단어의 빈도가 가장 높게 나타나지만, 2기에서 해당 단어의 출현 비중이 현저하게 컸다. 이는 ‘학생’이라는 연구 주제가 차지하는 관심의 정도가 1기에 비해서 훨씬 더 커졌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팬데믹 기간 전면·비대면

학술연구정보서비스에서 ‘higher education’ 검색 결과 워드 클라우드(2013~2022)

또는 하이브리드 수업이 활성화하면서 학생의 국제적 이동성, 온라인 학습 환경에서 학생의 적응, 학습효과, 만족도 등 주제가 새로운 관점에서 매우 활발하게 연구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시기별로 국제화 연구의 주요 키워드 변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기에는 없었던 ‘Sustainability’, ‘Covid’, ‘Mobility engagement’, ‘Quality’, ‘Role’ 등이 2기에 눈에 띄게 증가했다. ‘Sustainability’라는 단어는 근래 고등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라 할 수 있는 ‘지속가능성’이 지난 10년 동안 눈에 띄게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Covid’는 팬데믹이 고등교육 분야 전체에

불러본 영향을 보여준다. ‘Mobility’는 팬데믹이 국제 학생 이동(international student mobility) 흐름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코로나19가 불러온 물리적 접촉 제한과 글로벌 경기침체가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Quality’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지난 10년 동안 국제적 수준에서의 고등교육의 질 관리·보장 체계에 관한 학계의 관심이 증가했음을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Role’은 고등교육 국제화 20년을 거치면서 대학의 존재와 역할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분석 결과를 토대로 앞으로 고등교육 국제화 주요 어젠다를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본다. 첫째, 학생의 ‘학습’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전 세계 고등교육이 학생의 국제적 이동성과 온라인 학습 환경에서의 적응, 학습 효과, 만족도 등을 연구함으로써 학생의 학습 경험을 총체적으로 개선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지속가능성’이 중요한 주제로 두드러졌다는 점을 고려해 지속가능성과 대학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한 전략적 행동을 취해야 한다. 셋

째, 디지털 혁명과 산업의 변화에 따라 ‘대학의 역할 재정립’ 논의가 필요하다. 대학은 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역할을 자처해야 하며, AI·빅데이터, 산업 수요 등과의 연계를 통해 학생들이 미래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 넷째, 코로나19 이후 ‘국제 학생 이동성 변화’에 대비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학생 모집 전략과 온라인 교육 모델의 조정이 필요하다. 다양한 형태의 국제 교류 및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을 상기하면서, 앞으로의 정책과 방향성을 재검토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팬데

믹 이후 앞으로의 10년, 어떤 키워드가 고등교육 국제화의 중심에 있게 될 것인가.

김규석

고려대 교육학과 박사과정

고려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고려대 교육학과 교육행정·고등교육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0년부터 성균관대 국제처 등의 부서를 거치며 고등교육 국제화 분야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2017년부터 한국뉴욕주립대에서 전략기획팀장과 입학팀장으로 근무했다. 2012년에는 풀브라이트 스칼라로 선정돼 국제교육행정전문가 연수를 받았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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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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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이 새로운 트렌드가 될 수 있는 변화의 징후이다

학교안전사회 공헌운동본부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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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광문각출판미디어

세창출판사

조선, 전통생활사총서

서울대, 연구중심대학으로 시스템 재구조화 필요

데이터로 읽는 대학 17

서울대학교를 해부한다3

서울대의 글로벌 경쟁력

‘데이터로 읽는 대학’의 네 번째 주제 ‘서울대학교를 해부한다’의 세 번째 소주제는 ‘서울대의 글로벌 경쟁력’이다. 서울대는 자타공인 국내 최고의 대학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대학교이다.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모여있고, 가장 우수하다는 교수진이 포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2023년 4년제 일반대학 수를 보면, 미국은 2천850개교,일본은 780개교, 중국은 2천900개교 정도다. 한국은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대학을 포함하면 200개교 정도다. 세계의 주요 대학과 아시아 주요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에 대해 각종 세계대학평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의 2023년 국가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한국은 63개국 중 2021년 23위 → 2022년 27위 → 2023년 28위로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하락했다. 대학교육 경쟁력은 46위(2022년)다. OECD 자료(2023)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고등교육 성인(25~64세) 이수율은 52.8%로 최상위이며, 청년층(25~34세) 이수율은 69.6%로 1위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은

대학의 경쟁력을 살펴보면, 영국의 THE 세계대학(Times Higher Education) 평가에서 2023년 세계 200위권 내 국내 대학은 7개교이며, 이 중 5개교는 2022년 조사에서 순위가 하락했다. 상위 20개 대학에는 미국 12개교, 영국 3개교, 중국 2개교, 스위스·캐나다·싱가포르가 각 1개교로 나타났다. 아시아 대학 상위 20위에는 중국 6개교, 홍콩 5개교, 한국 3개교, 싱가포르 2개교, 일본 2개교, 사우디아라비아 1개교로 나타났다.

영국의 대학평가기관 QS(Quacquarelli Symonds)가 2023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QS 세계 대학 순위 상위 20위 대학에는 미국 10개교, 영국 4개교, 호주 3개교, 스위스·싱가포르·중국 각 1개교로 나타났다. 국내 대학은 Top 100위권 내에는 5개교가 포함되고, 2023년 Top 800에 30개교가 포함됐으나, 2024년에는 24개교로 줄었다.

2024 QS 아시아 대학순위 상위 10위에는 중국 4개교, 싱가포르 2개교, 홍콩 2개교, 한국 2개교가 올라 있다. 상위 100위 이내 대학 수는 중국 24개교, 한국 16개국, 일본 13개교, 말레이시아 9개교, 대만 8개교, 인도 7개교로 나타났다.

미국의 U.S. News & World Report 세계대학 평가를 살펴보면, 2022년 평가에서 세계 대학 1위는 하버드, 아시아대학 1위는 칭화대(26위), 국내 대학 1위는 서울대(130위)가 올라 있다.

세계대학 평가를 종합해 보면, 미국과 영국의 대

대학평가 세부 지표별 글로벌 상위 300위 대학 수와 연구 경쟁력

구 분 미국 영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한국

QS 세계 대학평가(개) 59 34 15 14 11 9 9

상해교통대 대학평가(개) 89 34 25 20 11 9 6

네이처, 사이언스 논문 게재 98 27 29 18 12 12 5

노벨상,필즈상 수상(개)

노벨상,필즈상 수상(개)

(졸업생) 82 25 19 3 7 14 0

(교 수) 58 17 12 0 8 10 0

학계 평판(개) 54 30 17 11 11 11 7

졸업생 평판(개) 43 33 15 10 14 6 9

외국인 교수 비율(개) 33 64 7 6 1 3 0

외국인 학생 비율(개) 39 77 6 2 0 9 1

피인용 횟수 상위 1% 논문수(건)

(2008-2018) 76,266 25,122 19,292 28,880 7,501 12,689 4,692

SCI 논문발표 현황(편)

(2019) 491,960 154,906 130,817 491,960 130,817 89,896 69,618

인공지능 관련 연구 수(건)

(2016-2019) 35,775 12,928 10,735 70,199 14,646 7,888 6,940

출처: 전국경제인연합회(2021). 한국대학 글로벌 경쟁력 국제비교. 글로벌 인사이트 vol. 67.

학이 압도적으로 많고 상위권에 올라 있으며, 이들 대학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시아 국가 중에는 중국과 홍콩, 싱가포르의 대학 경쟁력이 국내 상위권 대학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순위에 위치해 있다.

선진국 수준에 못 미치는 대학 경쟁력

우리나라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을 살펴보기 위해 QS와 상해교통대의 종합평가 세부지표별로 글로벌 300위 내의 대학 수를 분석해 보면, △(우수 논문 생산) 과학저널 논문게재 하위권, △(평판도) 대학 구성원(교수), 졸업생에 대한 평판도 선진국 대비 저조, △(국제화 수준) 외국인 교수 비율과 외국인 학생 비율 선진국 대비 하위권, △(연구역량) 우수 논문 수가 선진국과 비교해 매우 낮음,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양성) 4차산업혁명에 필요한 인공지능, 빅데이터 첨단분야 인재양성이 저조하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대학의 글로벌 경쟁력은 선진국이나 주요 아시아 국가와 비교해 저조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글로벌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대학의 경쟁력을 선진국 수준으로 제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각종 평가기관의 순위를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 최고 대학인 서울대의 존재성은 있지만, 글로벌 경쟁력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부적으로 각종 평가순위에서 나타난 서울대 글로벌 경쟁력과 위상을 살펴보자. 매년 고등교육기관을 평가하는 THE 대학평가 순위를 보면, 서울대는 2022년 국내 대학 중 가장 높은 54위에서 2023년에는 2단계 하락해서 56위에 랭크됐으며, 상위 20위 대학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3개 대학이 선정됐다. 그리고 THE 대학평가 아시아 대학 순위 20위에서는 2022년 8위에서 23년 11위로 3단계 떨어졌다. 대학의 학술적 수준으로 세계 대학을 평가하는 상하이교통대학교 평가에서는 서울대가

98위를 차지했다.

QS 세계 대학 평가에서는 서울대가 2023년 29위에서 2024년 41위로 12위나 하락했으며, 2024 QS 아시아 대학 평가 상위 30위에서는 서울대는 16위를 차지한 반면, 연세대(8위)와 고려대(9위)는 국내 대학 처음으로 TOP10에 진입했다. 카이스트는 13위, 서울대는 국내 대학 순위 4위를 차지해 아시아 대학순위에서 조차 경쟁력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올해 아시아 대학 평가에서는 25국의 857개 대학 순위를 매겼으며, 한국은 149개 대학이 참여했다.

이러한 세계 평가 순위가 다양한 지표와 가중치를 활용하는 관계로 누구나 인정하는 객관적인 지표는 아니다. 그런데도 서울대가 데이터로 평가되는 평가지표나 가중치에 미흡한 것은 사실이다.

서울대, 국내 최고라고 말할 수 있나

이제는 서울대가 국내 최고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금껏 관성적으로 해온 서울대의 교육과 연구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교육력 제고와 연구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냉정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우선은 연구중심대학으로 변모하기 위한 시스템 재구조화가 필요하다. 현실은 주요 선진국은 제외하고서라도 아시아의 떠오르는 혁신대학들에 밀리고, 국내의 혁신대학들과 경쟁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뒤돌아 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대만큼 국내 대학을 선도하는 대학이 되기 위해

서는 ‘국내 1등’이라는 자만심과 타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자성과 혁신을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

황인성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사무처장

대학평가와 고등교육 전문가로 교육통계 분석 작업에 참여해왔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을 거쳐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학정보공시센터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지냈다.

경북 26개 대학, 유학생 1만명 유치 나서

경북도, ‘해외유학생 계약학과’ 신설 방침

경북도가 도내 26개 대학과 함께 외국인 유학생 1만 명 유치에 본격 나섰다. 광역지자체가 우수 해외 인재 유치를 대학 지원 차원을 넘어, 지역 활성화 전략으로 삼고 있어 주목된다.

경북도는 지난 6일 대구대 성산홀에서 도내 대학 글로벌 인재 유치 담당자들과 함께 외국인 유학생 유치 지원 업무 간담회를 가졌다.

경북도는 외국인 유학생 1만 명 유치를 위해 ‘컴 투 코리아, 스터디 인 경북!’을 슬로건으로 정하고, 도의 신규 정책과 외국인 비자 정책 등을 안내했다. 대학 담당자의 의견과 제안 사항도 들었다.

경북도는 우수 해외 인재 유치를 위해서는 관계기관이 협업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도-지역대학-지역기업-유학원-각국 대사관까지 함께하는 ‘K-드림 협업체’구성 방안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해외 유학생 1만 명 유치는 물론 입국-교육-지역 정주의 외국인 지역 정착 프로세스를 구축한다는 계획이다.특히 외국인 유학생에게 기업 수요 맞춤형

교육을 지원하고, 지역특화형 비자를 제공하는 ‘해외유학생 계약학과’도 신설한다. 이는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해외인재특화형 교육국제화특구를 유치하고, K-U시티 사업과 연계해 추진하고 있는 지역산업기반 인재양성사업의 일환으로 외국인 유학생을 희망하는 지역의 중견·중소·뿌리기업과 연계해 추진한다.

경북도는 이외에도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경북학’ 강의 개설을 지원해 경북지역의 이해도를 높여나갈 예정이다. 경북에 대한 친근감과 정체성을 높이면 졸업 후 해외 유학생들의 경북 정주 비율도 더 높아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허윤홍 경북도 교육협력과장은 “지역대학은 인구감소 및 수도권 선호 현상으로 인해 학생 충원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해외의 우수한 인재들이 지역대학에 입학하고, 나아가 지역의 인재가 된다면 경북의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라며 “지역대학과 협업해 적극적인 외국인 유학생 유치 지원책을 펼쳐 경북의 외국인 유학생 1만 명 시대를 반드시 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한양여대 등 4개大, 빅데이터 공동교육

한양여대 등 4개 대학이 빅데이터를 활용한 특화분야 전문인력 양성에 나선다.

한양여대(총장 나세리)는 지난 2일 링크3.0 사업의 일환으로 ‘대학연합 빅데이터 공동교육과정’(DS4U) 개발과 운영을 위한 업무 협약식을 가졌다. 이날 한양여대를 비롯해 부산과기대, 인천재능대의 3개 산학연협력 선도대학(링크3.0) 사업단과 영진전문대 첨단분야 신융합대학 사업

단 단장이 참석했다. 사업단 간의 융합적 공유·협력을 통해 전공 학점 교류라는 성과를 창출해 냈다.

이들 4개 대학은 공유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네트워크 구축을 전제로 △빅데이터를 활용한 특화분야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공동 온라인 교육과정 개발 및 운영 협력 △빅데이터 공동교육과정 개발·운영을 위한 실무운영위원회 구성 및 지원 체계 수립 △교육과정 운영에 필요한 사항에 상호 간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이번 협약으로 개발된 교과목은 2024학년도 2학기부터 운영된다. 온라인 콘텐츠 교육으로 학점교류가 가능한 형태로 진행된다. 빅

데이터 공동교육과정 DS4U는 국가공인자격증인 데이터분석 준전문가(ADsP)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4개 대학의 전문성을 결합해 학생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다. 단순한 공동 교육프로그램이 아니라 실질적인 국가공인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강좌가 운영되는 게 특징이다.

신해웅 한양여대 산학협력단장은 “4개 대학의 전문성을 결합해 산학협력을 활성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라며 “이번 업무 협약으로 다양한 성과를 창출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교육체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승우 기자 editor@kyosu.net

한국어 문법의 정석

도서출판 역락

2024학년도 1학기 목원대학교 교수 초빙

대전 최초의 사립대학목 원대학교가 유능한 교수님을 모십니다.

초빙분야 및 인원(총21명)

초빙 분야 초빙학과

일반전임교원

(13명)

응급구조학과, 사회복지학과, 광고홍보커뮤니케이션학부, 경영학과, 부동산금융보험학과,

컴퓨터공학과(컴퓨터공학), 건축학부(건축계획 및 설계/건설관리 및 시공), 생명과학과,

식품제약학부, 미술학부, 도자디자인학과, 관현악·작곡학부

특별전임교원

(8명)

강의전담교원(4명) 컴퓨터공학과(임베디드SW), 국악과, 애니메이션학과, 게임콘텐츠학과

산학협력중점교원(4명) 산학협력단(산학협력일반, 기업지원, 창업지원)

임용시기 및 직급

• 임용예정 시기 : 2024. 3. 1.

• 임용직급 : 조교수

지원서 접수 및 서류 제출기한

• 온라인 접수기간 : 2023.11.08.(수)13:00 ~ 2023.11.23.(목) 15:00 (온라인접수만 가능)

• 서류 제출기한 : 2023.11.08.(수) 13:00 ~ 2023.11.24.(금) 17:00 (한국시각 기준) 교무과 도착분에 한함.

(주말, 공휴일은 접수 불가) : 지원서 등 출력물 서류 제출은 우편 접수만 가능합니다.

• 주 소 : 우) 35349 대전광역시 서구 도안북로 88(도안동) 목원대학교 교무과 교원 신규임용 담당자 앞

• 전 화 : (042)829-7092~7096 FAX : (042)829-7098

[88 Doanbuk-ro, Seo-gu, Daejeon, Korea 35349 Tel. +82·42·829·7092~7096 fax. +82·42·829·7098]

문의처

• 연락처 : Tel. (042) 829-7092~7096

• 주소 : 우) 35349 대전광역시 서구 도안북로 88(도안동) 목원대학교 교무처 교무과 교원 신규임용담당자

2023년 11월 8일

목원대학교 총장

내 일상이 미치는 영향력 성찰하기

천하제일연구자대회

59 어느 민속학자의 대혼돈 연구기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

한국의 민속학은 오랫동안 본질적인 민족문화 또는 민중문화의 틀 속에서 다양한 관행이 일상화되고 다시 일상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 민속학계와 인류학계에서는 기존 틀의 해체가 이뤄져 왔고 최근에는 새롭게 일상화되는 현상에도 관심을 기울여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어민, 필름 카메라 이용자, 농어촌과 도시 지역에서 공동체 운동 같은 분야의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최근 김은희 작가가 집필했던 「악귀」라는 드라마가 큰 관심을 끌었다. 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이유로 이 드라마를 좋아했다. 대중매체에 처음으로 민속학 전공자가 주연급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악귀」에서 꼽는 최고의 명장면은 배우 오정세가 경로당에서 할머니·할아버지들과 이야기하며 현지 조사를 하는 장면이다.

내가 하는 민속학은 「악귀」에 등장하는 오정세 배우와 조금 다르다. 사실 민속학 내에도 무당과 굿, 동제 등을 포함한 민간신앙과 의례 관련 연구자도 많이 있지만 사회조직이나 설화·생업·축제·의식주 관련 연구자도 많다.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는 민속학 연구자로서 내가 던지는 주된 질문은 농사를 어떻게 짓고 곡물을 어떻게 도정하며 어떤 밥을 먹는가와 같은 일상적 이야기다. 그렇다면 오정세 배우가 연기한 민속학자의 연구와 나의 연구는 민속학이란 같은 학문 범주 내에 묶일 수 있을까.

요동치는 민속학, 요동치는 연구자

잘 모르고 시작한 민속학이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민속학은 문헌과 현지 조사, 전근대와 근대, 합리성과 비합리성 등 여러 범주를 넘나들 수 있는 매력적인 학문이다. 나도 민속학과 관계를 맺으며 석사, 연구생, 박물관 기간제 연구원, 객원연구원, 위탁연구원, 박사수료로 직위가 달라졌고, 또한 누군가의 남편으로,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연구는 더 심하게 요동친다. 19세기 말부터 2010년대 초까지 인천 남촌동의 농업 변화를 다룬 연구로 시작해 일본 내 양파 도입과 보급에 관하여 오사카부 다지리정의 양파 재배를 중심으로 한 연구, 강원도 인제의 목재업과 길의 변화를 다룬 연구, 서울의 노인과 경로당에서의 생활을 다룬 연구,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조사한 연구 그리고 호미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연구도 했다.

내 연구가 다양한 이유는 많은 연구자 동료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어떠한 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채, 프로젝트 노동자로 살아온 것이 큰 이유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연구는 민속학 같지 않다는 평가도 자주 받았고 누군가는 일관성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사실 나조차도 헷갈릴 때가 있어 내 연구가 어떤 맥락에 있고 왜 민속학‘적’ 연구인지 구구절절하게 말하게 된다.

다만, 현시점에서 나의 연구 활동을 돌아본다면 개인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였든 용역을 통한 연구였든 상관없이 일상화와 비일상화라는 역동적 변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개인 또는 집단의 일상과 일상이 상호작용하는 현상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진행한 연구였다고 생각한다.

일상과 비일상의 역동적 변화에 주목하다

남촌동 연구는 농촌이었던 남촌동이 공단 배후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영농방식은 소비자의 기호를 염두에 둔 방식으로 바뀌었고, 유통 방식은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방식으로 변화

했다. 이는 남촌동이 근교 농촌일 때와는 또 다른 영농과 유통방식이었다. 양파 연구도 일상의 변화를 중심에 둔 연구였다. 현대 일본 가정집에 양파가 상비된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일본에서 점차 일상화하는 육류 요리에 양파가 곁들이는 채소로 자리 잡은 것과 관련 있다. 일본 내 양파 소비의 증가는 다시 다지리 정을 양파 산지로 변화시켰고 이는 지역 내 농업과 경관 그리고 주민의 일상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가축위생방역지원본부 노동자 관련 조사에서는 한국의 육류 소비의 일상화라는 변화와 이를 지탱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축 전염병을 방역하고 도축된 육류를 검사하는 노동자를 조사했다. 민속학이란 학문의 성립은 결국 근대화 과정에서 과거의 ‘일상’이 비일상화 되는 과정에 주목하고 그 현상을 해석하면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의 민속학이 오랫동안 본질적인 민족문화 또는 민중문화라는 틀에서 일상화와 비일상화의 현상을 바라본 것은 사실이고 이에 대한 해체 역시 최근 20여 년 동안 한국 민속학계에서 이뤄져 왔다. 최근에는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새롭게 일상화되는 현상에도 관심을 기울여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어민, 필름 카메라 이용자, 농어촌과 도시 지역에서 공동체 운동 같은 분야의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일본인이 원했던 백미, 조선인의 일상을 바꾸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쌀을 선택했다. 원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일본에서 연구했던 양파를 확장해 다뤄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도 교수님께 족발집에서 나의 결심을 말씀드렸다. 저는 양파로 박사학위 논문을 써보려고 합니다. 지도교수님은 묵묵히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마디를 하셨다. “양파도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그걸로 박사논문을 쓴 뒤에 어떻게 할거냐?” 결국 양파 관련 논문을 써서 어느

경기도 양평군 송촌리에 있는 용진정미소는 1950년대부터 2009년까지 운영됐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용진정미소 이외에도 소규모 정미소가 여러 군데 있었다. 이 정미소들은 쌀 도정만이 아니라 미곡 유통, 각종 농산물 가공과 함께 이불 솜을 타는 일 등 다양한 기능을 담당했다. 현재 용진정 미소는 마을기록관으로 바뀌어 운영 중이다. 사진 제공=이민재

방향으로 취업을 할 것이냐는 말씀이었다. 그렇다. 박사학위 취득을 꿈꾸는 학생에게 박사논문은 곧 나의 생업과 긴밀히 연관된 연구이다. 그래서 결국 가장 확장성이 넓다고 생각되는 쌀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잡았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쌀이라고는 하지만 쌀이 한국인의 역사와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그래서 현재 한국인의 일상 속 쌀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주제를 좁혀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던진 첫 질문은 19세기 조선과 현재 한국의 쌀 재배와 소비의 여러 변화 중 근본적 변화는 무엇일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질문의 답이 자신이 먹는 쌀을 대부분 직접 재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시대부터 쌀은 중요한 곡물이었지만, 쌀을 생산하는 측의 욕구와 맥락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그랬던 쌀에서 생산자가 아니라 소비자의 욕구와 맥락을 반영한 쌀을 생산한다는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의미의 ‘쌀’을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의 근현대 쌀 생산에 있어 소비자라는 존재를 처음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가, 일본에 조선의 쌀이 상품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1890년 이후로 설정한다. 그리고 1890년 이후 일본에서 조선의 쌀이 상품으로써 판매 권역을 넓히고 일본인의 식생활에서 일상화되는 과정과 함께 대량의 쌀이 일본으로 판매되면서 필연적으로 조선인의 일상에 생기는 변화에 주목했다. 특히 조선인의 쌀 가공과 소비 관행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변화만 초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쌀은 조선인의 일상 속 수많은 사상(事象)과 연결된 물질이었다. 그 물질이 일본인이 원하는 쌀이 된다는 것은 식민지 조선인의 일상을 뒤바꿔 놓는 변화였다. 그 가운데 상품화와 긴밀히 연결된 쌀 가공·소비 관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재래 농기구가 아닌 발동기·증기기관·가스

터빈·모터 등을 이용한 정미기가 들어와 개항장을 중심으로 대형 정미소를 정점으로 한 정미업이 하나의 산업군을 형성했다. 이로 인해 쌀의 도정 정도 역시 일본인의 기호에 맞는 백미, 즉 쌀눈과 쌀겨를 완전히 제거한 형태의 백미 소비가 식민지 조선의 도시를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나의 하루가 누군가의 일상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일상이 변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용하는 도구가 달라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상을 구성하는 망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나는 제국과 식민지, 계급, 가족 내 질서에 따라 일상 변화에 따른 이익과 고통의 불가능한 분배가 이뤄졌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에 이뤄진 변화는 식민지 시기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에 변화한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변용된 형태로 확산하여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점차 한국인의 일상으로 자리 잡아 현재 한국인의 일상에도 그 영향력이 미치고 있음을 밝혔다.

식민지기의 소비자인 일본인의 일상 변화가 쌀을 매개로 조선인의 일상에 큰 영향을 끼쳤듯, 현재 수많은 농산물을 수입하고 그 농산물을 소비하는 한국인의 일상은 지구 어느 편의 누군가의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당장, 한국인이 소비하는 국내산 농산물도 농촌 비닐하우스와 축사에서 일하는 고령의 노인과 이주노동자가 만들고 있고, 그들의 일상은 도시에 사는 우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일상과 비일상화라는 과정에 주목하고 이를 해석한다는 것은 각기 분리되어 있는듯한 우리의 일상이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게끔 한다.

앞으로도 너무 잔잔해 보여서 「악귀」 같은 K드라마에는 나오지 않겠지만, 일상과 비일상의 변화 과정을 “원래 그런 거지” “다 그렇지”라는 말로 지나치지 않는 그리고 내 일상이 미치는 영향력을 성찰하는 민속학 연구자가 되어 보고자 한다.

이민재

국립목포대 문화와자연 유산연구소 전임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인류학·민속학(민속학 전공)이라는 복잡한 전공으로 석·박사를 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1890~1961년 쌀 가공·소비 관행의 변화 : 상품조선미에서 ‘백미’로」를 썼다. 주요 관심사는 일상화와 비일상화라는 관점에서 곡물·도구 등 물질이 인간과 맺는 관계이고, 이 관계를 문자·통계·구술·관찰 등 여러 자료를 넘나들며 살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목포대 문화와자연유산연구소에서 도서 연안 공동체 관계 문서의 수집과 DB구축을 중심으로 바닷가를 조금씩 다니고 있다.

아버지 그늘에 가려 잊힌 ‘긍원 김양기’를 만나다

김홍도와 아들 ‘연록’ 이야기

김홍도가 지은 r연록s은 후일 ‘양기’로 개명

완당 김정희도 김양기의 작가적 소질 칭찬

도화서 화원 김홍도는 정조 초상화 제작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791년 12월 22일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돼 약 3년(1791∼1795) 동안 재직했다. 부임 첫해를 포함해서 1793년과 1794년 연풍에 큰 기근이 연이었다. 현감 김홍도는 한걸음에 백두대간 공정산(현 조령산) 해발 1,026미터 8부 능선에 자리한 상암사(1792년 5월경 추정)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이 산(상암)에 빌어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는 문헌이 조선사찰사료(1911) 『연풍군 공정산 상암사 중수기』에 전한다. 현재 상암의 절 모습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있다.

김홍도의 늦둥이 아들은 어릴 적 이름이 연록(延祿)인데, 즉 김홍도가 현감 재직 때 나라로부터 녹(祿)을 받을 때 얻은 아들이라 연풍의 ‘연(延)’자와 녹봉(祿俸)의 ‘녹(祿)’ 자로 ‘연록’이라 한다. 양기는 후일 개명한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록의 이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유묵첩』에서 확인된다. 필자는 지난해 1월 21일 『단원유묵첩』 실견을 통해 연록을 확인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을축년(1805년) 단구(김홍도)가 회갑이 되는 해 정월 22일 아침에 우연히 써서 연록에게

준다(乙丑丹邱之甲年也元月二十二朝偶書贈延祿).” 바로 이 내용의 마지막에 연록 이름이 있다.

연록 이름의 근원이 되는 상암사

그동안 연록 이름의 근원이 되는 상암사는 무성한 잡초 속에 잊혀 버렸다. 필자는 잡초 속에 잊혀 가는 상암의 흔적이 매우 안타까워 연풍 주민들과 함께 부처님 오신 날(불기 2566년)을 맞이해 지난해 4월 28일 상암사 터에서 봉축 행사를 진행했다. 현감 김홍도가 연풍을 떠난 지 약 227여 년 만에 처음으로 상암에 연등의 불을 밝히고 법주사 스님의 염불 목탁 소리가 상암에 가득했다. 이렇게 상암은 새로운 역사적 순간을 강하게 움켜잡고 긴 잠에서 깨어났다.

올해에도 상암사 터 부처님 오신 날 행사는 이어졌다. 필자는 그 역사적 감흥을 이어 올해 10월 14일부터 이틀간 제40회 연풍 조령 문화제 때 양기 작품을 폼보드에 인쇄를 해서 국내 최초로 ‘연풍현감 김홍도 아들 양기(연록) 작품과 연풍면의 첫 만남’을 기획했다. 아울러 학술발표도 함께 진행했다. 그동안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려 잊혔던 연록(1793년 출생 추정)이 태어난 지 약 2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집을 떠나 고향과 다름없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찾아 주민들을 만났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조의 화가 22」 기고를 통해 긍원 김양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완당 김정희도 긍원 작품에 붙인 화

『단원유묵첩』(국립중앙박물관)에 표기된 ‘연록’이다. 2022년 1월 21일 촬영했다. 그림=이근우

제 「제금화사(題金畵師) 천리(千里) 방주야운완당집(방朱野雲阮堂集)」 속에서 칭찬하고 있다. 말하자면 긍원은 그의 부친 단원이 끼쳐 준 후광 속에 그의 작가적 소질이 원만하게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김홍도 부자 이야기

2014년부터 연풍현감 김홍도와 상암사 관련 논문을 준비하면서 연풍과 상암사는 필자에게 연구목적 이전에 삶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연구 맥락을 살펴보면 △김홍도 도화서 입문 △도화서 터 △정조와의 만남 △정조 초상화 제작 참여 △연풍현감 제수 △관료 행적 △상암사 중수기 △연록(양기) △단원유묵첩 △양기(연록) 작품 연풍과의 첫 만남과 학술발표로 이어지는 문헌 고증과 현장 답사를 통해 김홍도 부자 이야기를 국내 처음으로 필자가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10년의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책 발간과 함께 김홍도의 삶과 예술에 있어 작지만 한 뼘의

새로운 공간이 채워질 것으로 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김홍도 그림에 관한 연구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현감 김홍도·상암사·연록(양기)·단원유묵첩에 관한 연구와 재조명은 매우 미미한 단계이다. 특히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리어 그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연록에 관한 재조명은 첫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의 흔적을 찾아 그 모양새를 다듬는 일은 마치 대장장이가 무쇠를 녹여 수백 번 수 천 번 망치질의 손을 거쳐야 온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연장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장 하나가 한 가족을 먹여 살리게 되며, 한 해의 풍년을 기약할 수 있게 된다. 조선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칭송되는 김홍도 부자 이야기는 아직 쇠를 달구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이전의 역사와 문화가 찬란했다 하더라도 사람이 찾지 않으면 사라진다. 윤봉길 의사에 관한 글 한 구절을 기억해 보며 글을 마무리한

다. 걷고 또 걸어야 길이 생긴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이근우

중원대 교수·동양화

중국 남경예술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만의 난현 예술학회 고문이자 동서미술문화학회·한국동양예술학회 회원이다. 『연풍현감 김홍도와 상암사 이야기』 등을 집필했다.

‘동양고전번역의 AI활용과 미래’

온라인 학술발표회 열린다

오는 15일 전통문화연구회 온라인 개최

AI가 번역에 미치는 영향․미래 번역가 역할

어떻게 하면 고전 문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AI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한 학술발표회 ‘동양고전 번역의 AI활용과 미래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의 과제’가 오는 15일 2시 온라인으로 열린다. AI가 번역 분야에 미치는 영향과 함께 미래 번역가들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번 학술발표회를 통해 우리는 인간과 기술의

협업이 어떻게 새로운 문화 생성 및 이해를 가능케 하는지를 살펴본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전하고, 현대 독자들에게 더 가깝게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이날 주제발표는 김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인문정보학)의 「인공지능시대의 한문교육」, 이청호 에버트란 이사의 「AI와 고전번역」, 윤종웅 윤즈정보개발 인문정보연구소 소장의 「동양고전 漢韓말뭉치 구축과 활용」, 김우정 단국대 교수(한문교육과)의 「‘한문고전 자동번역’ 개발의 의미와 과제」으로 진행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원자력을 생활 에너지로 만들다

여성과학기술인 이야기 29 최은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이 시대 여성과학인 소개 캠페인 ‘She Did it’을 펼치고 있다. 〈교수신문〉은 여성과학기술인이 본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경력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WISET과 공동으로 소개한다. 여성과학기술인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생생한 목소리가 교수 사회에 진심을 담아 전달되길 기대한다. 스물아홉 번째는 최은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이다.

최은영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선진핵주기기술개발부에서 원자력재순환, 용융염 이용 기술과 에너지 재료 관련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 전임교원으로서 학생들에게 원자력과학기술도 가르치고 있다.

“수학·과학에 재능이 없어 잘하는 사

람들을 동경했던 것 같다. 이과를 선택했던 것은 문과를 다니던 두 언니와는 좀 다른 길을 가고 싶어서였다. 화학과 물리를 공부하던 선배들이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

언니가 카이스트로 진학하면서 이공계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최 책임연구원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할 때, 자유로운 대화와 소통을 통해 각종 연구 아이디어를 나누는 티타임 문화에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가장 좋은 연구 환경은 연구자들이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 책임연구원은 2008년 한국원자력연구원에 입사해 줄곧 파이로프로세싱

(pyroprocessing) 연구를 했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순환하기 위한 기술이다. 사용후핵연료에는 그대로 땅에 묻기에는 아까운 유용한 원소가 많이 남아있다. “파이로프로세싱 공정 중 하나인 전해환원 공정은 산화물을 금속으로 전환하는 전기화학적 기술이다. 산화물에서 산소를 떼어내서 금속으로 만드는 일이다.

입사 후 우라늄산화물 수 그램에서 수십 그램을 이용한 기초 실험부터 수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실험을 동시에 진행했다.”

사용후핵연료 재순환 위한 ‘파이로프로세싱’

그는 “프로젝트 목표가 타이트하게 설정되는 바람에 공정 최적화와 50킬로그램 규모 장치 설계도 동시에 했다. 최종목표는 스케일업 장치 개발과 검증을 통한 실용화였다”라며 “전해환원 분야는 수십 킬로그램 장치로 실험한 사례가 없어 참고할 만한 해외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많은 실험을 통해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코피 로드

비극의 탄생 세트

프리드리히 니체 원저 | 이남석 옮김 | 평사리 | 1,888쪽

보불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굴복시켰고, 점령지 파리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니체는 다시 독일이 강력해지는 시기에 왜, 바그너의 음악극과 같은 뛰어난 예술이 탄생하는가에 주목한다. 비극은 무엇인가, 음악정신은 무엇인가? 왜, 약한 국가가 강력해질 때 비극(음악)은 대유행하고, 비극(음악)이 죽었을 때 강력했던 국가는 몰락하는가?

질주와 성좌 마르크스와 프루스트

장재현 지음 | 바오 | 464쪽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독서의 기록이자 두 책을 빽빽하게 채운 활자와 문장들이 이룬 숲에 대한 묘사다. AI가 인간을 대신하고,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 자체가 아예 사라질지도 모르는 기후 위기 시대에 마르크스와 프루스트의 책을 읽고 말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감정의 문화정치

사라 아메드 지음 | 시우 옮김 | 오월의봄 | 568쪽

감정의 문화정치가 하는 구조적 모순을 인지하고 있어도 사회가 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권력관계는 집단적인 저항에도 완고하게 지속되는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투자’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즉 우리가 사회적 규범에 계속 ‘투자’하기 때문에 이 세계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적 이상과 일치된 삶을 추구하고, 이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

애국의 계보학

실라 미요시 야거 지음 | 조고은 옮김 | 나무연필 | 296쪽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는 한국 사회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오랫동안 회자돼온 레토릭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가? 최근 불거진 '국가 정통성' 논란은 이 질문에 대한 익숙한 변주일 터. 실라 미요시 야거가 펼쳐 보이는 애국의 계보도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강대국 지정학

니컬러스 J. 스파이크먼 지음 | 김연지 외 3인 옮김 | 글항아리 | 740쪽

지정학의 살아 있는 고전인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출간됐다. 1920년대에 국제연맹을 지지하며 윌슨주의자를 자처한 저자는 대공황과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을 목격하며 국제법과 집단안보에 대한 기대를 접고 각국의 힘과 지리적 토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립주의가 환상일 뿐이며 미국은 늘 다른 대륙에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시아 1945-1990

폴 토머스 체임벌린 지음 | 김남섭 옮김 | 이데아 | 968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기, 역설적이게도 서구가 ‘장기 평화’의 시간을 누리는 동안, 아시아는 왜 이토록 참혹한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을까? 이 책은 아시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폭넓게 재구성하며 비극이 왜 일어났고, 오늘날 이 문제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날카롭게 풀어낸다.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현대사’로서는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책이다.

행간의 햄릿

강태경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872쪽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전 작품을 통해, 특히 『햄릿』에서 정신적 포용성의 가치를 구현한다. 이분법과 양극화의 황폐한 이념적·사회적 지형 위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햄릿』 읽기가 더욱 절실한 이유다. 셰익스피어는 단정 짓지 않는다. 상하와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 모두를 품는다. 쉬운 답을 내놓는 대신 이 존재론적 질문을 가슴 깊이 품는다.

지역개발론

앤디 파이크 외 2인 지음 | 이재열 옮김 | 푸른길 | 448쪽

지역개발 분야의 주요 이론과 핵심 개념을 알기 쉽게 풀어낸 이 책이 출간됐다. 여기의 ‘지역개발’이란 지역이 더 나은 상태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발전의 과정을 뜻하는데, 지역개발의 주체와 접근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인구·사회·정치·문화·환경·생태 관련 분야까지 확장된다. 지역개발은 다양한 제도의 정책 개입 대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마약시대

백승만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96쪽

대마약시대가 왔다. 연예인과 유명인의 마약 복용 사건이 수개월마다 매스컴에 올라온다. 우리 주변의 보통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받아 중독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다크웹과 SNS를 이용한 마약 거래가 늘어나면서 마약 사용자의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이라는 자부심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됐다.

저자가 말하다_『스위스 모델』 이광훈 지음 | 388쪽 | 문우사

지방자치 트릴레마 그리고 스위스의 길

한국의 지방자치, 제도·리더십의 ‘탈동조화’

리더십·제도·자원 선순환 관계가 성공 요인

한국은 지금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양자 간 선순환을 통한 질적

도약을 요청하고 있다. 패스트 팔로워를 넘어 이제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퍼스트 무버가 되어야 하는 거대한 전환에 직면해 있다.

중진국 함정을 극복하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당대의 내·외부적 도전과 위기를 극복한 나라들의 국가운영 ‘모델’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간 우리 사회의 담론 장에서는 다양한 자본주의 체제 관점에서 미국식 시장경제 모델과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은 물론 복지국가 차원의 노르딕 모델 등이 백가쟁명의 논의가 펼쳐져 왔다. 이 책은 피상적인 ‘신화’로, 심지어는 잘못 알려져 온 스위스 모델에 대한 상식과 오해를 불식하고 미래 한국의 지속가능 발전에 필요한 시사점을 탐색하기 위해 저술됐다.

그러면 왜 스위스 모델인가? 스위스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글로벌 시장의 경쟁 속에서 이룩해 낸 월등한 경제적 번영과 국가경쟁력·혁신 성과 때문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지방자치 연구자나 실무가가 지방자치의 준거 혹은 롤 모델로 스위스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고, 일반 시민들도 스위스의 ‘동화’를 꿈꾸며 찬사를 보낸다.

국가운영의 중심 축이 지역 수준의 분권적인 자치에 기반하고 있는 스위스는

지역적 자치단위의 자율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이로써 국가적 차원의 통치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함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경쟁력 제고와 높은 수준의 경제 성과와 국민 행복을 이룩해 내어 소위 ‘스위스 패러독스’로 일컬어지며 일견 역설적인 성공 모델로 손꼽히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스위스 ‘성공신화’가 우리나라의 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에게 얼마나 제대로 알려져 있는가? 정말 스위스의 지방자치제도를 직수입하면 이 땅에도 지방자치의 ‘천국’이 펼쳐질 수 있을 것인가? 선진국의 ‘좋은’ 제도를 들여와 우리 것으로 소화해 보려 했던 많은 개혁의 시도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종국에는 용두사미식으로 귀결되는 것을 너무나

자주 목도해 온 우리의 지난 기억을 소환해 본다. 그렇다면 스위스 지방자치 제도의 시공간을 초월한 한국적 맥락의 착근화 혹은 토착화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은 타당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오랜 중앙집권 국가의 역사를 경험해 오다가 지방자치 제도가 위로부터 아래로 이식됐다. 자치 관련 법제화로 공식적 제도가 도입된 이래 지방의회·지방자치단체장 등 리더십의 선출과 교체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선출된 리더는 지방자치의 성공적인 제도화에 기여하기보다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교체되기를 반복해 왔다. 제도와 리더십의 이

러한 ‘탈동조화(de-coupling)’는 지방자치의 유무형적 토대가 되는 자원의 부족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부족한 자원은 제도-리더십의 탈동조화를 초래함과 동시에 탈동조화된 제도-리더십은 다시 자원의 고갈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구조화시킨다. 이러한 지방자치의 트릴레마, 즉, 리더십-제도-자원의 3요소 중 어느 하나를 추구하려다 보면, 다른 두 가지를 이룰 수 없는 삼각 딜레마 상황의 악순환 고리는, 제도-리더십-자원 간 상호 구축(驅逐) 효과를 파생시킴으로써 부정적 피드백이 반복돼 결국 지방자치의 위기가 고착화되고 만다.

스위스 지방자치 제도의 심층적 기저에 존재하는 작동원리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제도의 기반이 되는 자원은 무엇이며, 제도의 생성·지속·변화 과정에서 행위자의 리더십은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는가? 스위스 지방자치의 성공 요인으로서 리더십과 제도와 자원 간에는 선순환 관계가 존재함을 이 책은 다양한 실증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향후 인구 규모의 급감이 예상되는 우리나라에게는 다가올 ‘양적’ 인구 위기 속에서 인적자원의 ‘질적’ 혁신을 일구어내는 데 스위스 모델이 참조 사례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제도의 총체성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관련 법제의 모방을 통한 유사 제도 동형화에 그칠 위험성을 경계

할 필요가 있음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이광훈

강원대 행정학과 교수

서평_『명화, 병사에게 말 걸다』 윤수진 지음 | 박이정출판사 | 216쪽

어둠 속 배회하던 병사, ‘튼튼이’로 거듭나다

언어폭력으로 괴로워하던 아들 보며 미술치료를 공부

명화감상 미술활동이 살아있는 감각 병사에게 찾아줘

아들을 군대 보낸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 2017년 아들이 군에 입대했다. 대인관계를 잘 하던 아들은 선임들의 언어폭력 때문에 무너졌다. 아들은 이렇게까지 얘기했다. “엄마, 차라리 맞으면 좋겠어요. 몸이 힘든 건 얼마든지 참겠는데 선임들의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명화감상 미술치료 공부하기로 했다. 그 후 전입 신병들에게 프로그램을 적용했고, 그 경험을 책에 담았다.

이 책의 저자 윤수진 인하대 초빙교수(인문융합치료학과)는 지난해 「전입 신병의 명화감상 집단미술치료 프로그램 경험에 관한 질적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이전까지 부적응 병사들은 심리적인 문제를 갖고 있으리라 생

각해왔지만, 적응과 부적응은 부대에서 어떤 선임을 만나느냐에 따라 종이 한 장 뒤집듯 바뀔 수 있을 만큼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었다. 모든 전입 신병은 잠재적 부적응자인 것이다.”, “미술활동은 군대 안에서 긴장하고 위축된 병사들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찾아주었다.”

저자에 따르면, 올해 기준으로 입대하는 병사의 평균 나이가 21.7세다. 군인 대부분이 19∼24세인데, 이들은 ‘후기청 소년기’에 해당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후기청소년은 관계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선임과 문제가 발생하면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한다. “이 시기에 다른 사람과 긍정적이고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자신을 유능한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과 사회적인 능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반면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실패하면 자신에 대해 불

안해하게 되고 사회적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으며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더욱 병사에 대한 관심과 미술치료가 필요하다.

실제로 명화감상 미술치료 프로그램은 자대 배치를 받은 지 3개월 미만인 전입 신병 9명을 대상으로 했다. 2021년 11월부터 2개월 간 주 2회, 총 10회 진행했다. 각 단계의 주제와 활용된 명화만 보아도 어떤 프로그램일지 짐작이 간다. ①나를 소개해요(고흐·피카소·렘브란트 등의 「자화상」) ②나, 이런 사람이야(바스키아의 「무제」 ③내멋대로 난화(칸딘스키의 「구성」 등) ④내 감정이 보이니?(마크 로스코의 「무제」) ⑤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샤갈의 「나와 마을」) ⑥너와 나의 희망 연결(오키프 「달로 가

는 사다리」 ⑦간직하고 싶은 나, 버리고 싶은 나(쩡판즈의 「가면 시리즈」) ⑧서로의 장점 찾아주기(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⑨내 꿈을 키워요(프리드리히의 「안개낀 바다위이 방랑자」) ⑩통하는 우리(키스 해링의 「무제」).

바스키아의 「무제」를 보고 자신의 자화상을 그린 한 병사는 소감문에서 “여러 자화상을 보면서 웃고 있는 명화보다 슬픈 표정의 명화가 많아 자신만 우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를 받았다”라고 밝혔다. 특히 그는 동기와 함께 낙서하듯 그리는 난화를 작업하면서 “아무렇게나 표현하는 미술활동을 통해 미술이 재미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라고 말했다. 이 병사에 대해 저자는 “초반에 ‘다크템플러(어둠 속을 배회하는 사람)’라고 지은 닉네임이 우울해 보인다며 ‘튼튼이’로 바꾸고 싶다고 말하

위쪽부터 고흐의 「자화상」과 이 명화를 보고 병사가 그린 자신의 자화상. 그림=박이정

여 이 시간을 통해 조금씩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강조했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고 자신을 그린 또 다른 병사는 “명화를 보고 느낀 감정과 화가의 의도가 너무 달라 신기했다” 라고 소감을 말했다. 특히 그 병사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 부담이 있었는데 미술작품 완성 후 어떤 기준에 맞춰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 편안했다”라고 평했다. “이 프로그램은 나에게 ‘거울’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미술작품에 내 마음과 가치관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저자가 말하다_『한국어 문법의 정석』 김홍범 지음 | 역락 | 528쪽

‘토론·문답’으로 문법 교육을 혁신하라

생각하는 문법과 생활 속의 개념을 반영

예제 문항으로 문제 중심의 교수법 제공

문법이 우리나라에서 학문으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한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동안 많은 국어학자들의 연구 업적이 축적됐다. 이제는 언어 번역기의 등장과 같이 사회생활에도 문법이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이르렀다.

문법과 더불어 문법 교육도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냈다고 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간혹 문법 무용론이 등장할 만큼 문법 교육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적지 않은 대중이 이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 전 문법 교육의 정상화를 목표로 한국문법교육학회가 창립돼 문법 교육의 내용·방법에 대한 연구가 이어져 왔지만, 중고등학교·대학에서의 문법 교육에 대한 질적 평가는 여전히 긍정적이지 않다.

글쓴이는 학교 문법이든 학문 문법이든 문법의 유용성과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암기하는 문법에서 벗어나 생각하는 문법·생활 속의 문법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문법 지식이 단순한 선행 지식으로서 국어 사용 능력의 신장에만 기여하는 것을 뛰어넘어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고등 사고력’과 밀접하게 연관돼야 한다.

‘고등 사고력’은 다양한 사고력을 통합하는 것으로 비판적·창의적 사고력·메타

인지를 구성 요소로 하기 때문에 문법 내용 기술과 문법 교육의 바탕이 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고등 사고력과 더불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기’를 통해 사고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함으로써 학습자들의 탐구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문법을 공부하는 학습자들은 줄글로 설명이 되어 있는 문법서의 내용 중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외우는 방식으로 학습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줄글 형식의 책에 대한 흥미도도 높지 않다. 글쓴이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으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 오던 중 문법책의 새로운 구성과 교수법을 구안했다. 이러한 과정과 동기를 바탕으로 예제 문항 중심의 교수법을 반영한 『한국어 문법의 정석』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예제’들은 범용 문법이라 할 만하기 때문에 학습자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제 문항을 통한 문제 중심의 교수 학습 방법은 문법 지식을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수 학습 자료를 제작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하다. ‘예제’를 해결해 나가는 절차는 교과 교육학적인 요소도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크게 염두에 둔 것은 문법 과목을 꺼리는 학습자들도 접근이

가능하도록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아울러 학습자의 학습 능력 차이를 고려한 맞춤형 학습을 할 수 있도록 기술했으며, 자기 주도적 학습 또한 도전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예제 문항 중심의 문법서를 집필하게 된 배경은 그동안 두 가지 교수법을 강의 시간에 실행해 본 경험이다. 한 가지는 토론 교수법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문답법이다. 학문적 논쟁거리 중심의 아카데미식 문법 토론 교수법과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활용한 문법 교수법을 통해 정보 습득과 지식 구성 능력을 증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오늘날의 지식 기반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 생성 능력의 바탕이 되는 창의성을 계발하는 방법에 주목해 왔다. 전 세계적으로 창의성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하다.

글쓴이는 창의성을 계발하는 데 문법 교육이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방식의 문법 교육으로는 그 실효성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평가한다. 생각하는 문법의 개념이 반영된 문법 교육이어야 한다. 그동안 좋은 교수 학습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탐구 학습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탐구 학습을 실현할 자료가 풍부하게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인데, 그 대안으로 이 책을 탐구 학습의

자료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김홍범

한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통찰의 재미_『니체의 삶』 | 수 프리도 지음 | 박선영 옮김 | 비잉 | 692쪽

절망의 시대에는 니체가 필요하다

허무주의와 혼돈의 시대에 필요한 이정표

삶의 긍정·의지 견지하는 실존주의의 시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까지 겹쳐지면서 인간은 얼마든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무고한 생명에 대한 학살과 무자비한 폭력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보았던 인간의 집단적 광기를 재연하고 있다.

이성적 존재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세상에 평화와 구원을 주겠다는 신에 대한 믿음에 심각한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어디에도 희망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길을 잃어버린 듯 허무주의의 망령이 거리를 배회하는 시대엔 니체가 필요하다. 극심한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번민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삶의 견고한 의지를 재건한 ‘초인’이었던 철학자 니체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에게 혼돈의 시기에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는 이정표가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사실 그 많은 철학자 중에 니체만큼 오해하고 오독되는 사람도 없다. 이를테면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을 구성하는 ‘힘에의 의지’는 심지어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 의해 인종청소의 논리로 왜곡되기도 했고, 지금도 출판 시장에서는 그의 많은 ‘명언’들을 발췌해 인용한 수많은 자기계발서의 단골로 오용되고 있을 정도다. 니체를 그저 자기계발서로 소비하는 것은 그의 사상과 언명을 너무 협소하고 편협하게 낭비하는 것이다.

허무주의와 무신론을 대변하는 의미로 인용되는 니체의 언명 ‘신은 죽었다’ 역시 그의 사상 중 대표적으로 자주 오해받는 생각 중의 하나다. 그 자신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실제로 결국 무신론자가 되기는 했다. 그러나 이 말이 단지 무신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신은 당대의 보편적 가치와 권위·제도·도덕과 종교 등 개인의 자아와 주체성을 억압하는 일체의 가치 체계를 상징하는 아포리즘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세상의 권위와 기준이 사라졌다는 허무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삶을 긍정하고 삶의 의지를 견지하는 실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언명이었다.

전기작가인 저자 수 프리도는 이 책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인 호손덴상을 수상했다. 이 책 이전에도 작품 『절규』로 유명한 에드워드 뭉크의 전기를 써 영국의 세계적인 전기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을 정도로 믿을만한 작가다. 이 책에서 그는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의 주변 사람들을 보라는 말처럼 니체에게 중요한 사람들을 조명하는 방법으로 니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가 존경했던 음악가 바그너, 니체의 연인이었던 코지마와 살로메 심지어 그의 악한 여동생 엘리자베스까지 다양한 인물을 그려내는 그의 글솜씨는 시사지 <뉴욕타임스>가 ‘평전을 문학 작품의

경지로 승화시켰다’고 격찬할 정도로 뛰어나다. 심지어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영국·스위스·독일·미국 등에서 활동하는 많은 학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무려 4년의 시간을 투자했다.

『니체의 삶』은 ‘음악의 밤’이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첫 장부터 개인적 일화를 통해 인간 니체가 성장한 과정과 니체의 철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우리가 몰랐던 인간 니체의 처절했던 삶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이 형성된 삶의 맥락과 『비극의 탄생』을 시작으로 니체의 마지막 작품인 『이 사람을 보라』까지 이어지는 니체 철학의 요체를 체감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극심한 고통과 우울 속에서도 허무주의에 침잠하지 않고 삶의 의지를 굳건히 세운 그의 삶이 그의 철학의 맥락과 배경이었다. 니체를 발견한 후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재미’를 탐구하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동안 그는 반대로 ‘고통’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나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밖에 있는 신도, 종교도, 도덕도 아니고 내 안에 있는 본연의 나, 참된 나를 발견하는 것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방이 흑암으로 둘러싸인 것 같고 우리의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때가 바로 우리에게 니체가 필요한 시간이다.

김선진

‘재미 연구서’ 『재미의 본질』 저자

도시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이희복 지음 | 한울아카데미 | 304쪽

미래 인재 양성에 힘쓰며, 저술 작업을 꾸준히 해온 저자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체험한 교재 부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이 책을 저술했다. ‘도시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기초로, 관련 분야에서 쌓은 저자의 내공과 학생들과의 소통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더해 이론과 실무에 충실한 최적의 교재를 만들었다.

스토리의 유혹

피터 브룩스 지음 | 백준걸 옮김 | 앨피 | 246쪽

서사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플롯 찾아 읽기(Reading for the Plot)』의 후속편이라 할 만한 책. 스토리텔링의 힘과 중요성, 그 반대급부로서의 위험성을 문학부터 법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례를 들어 통찰한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서사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고, 서사를 도구 삼아 의미를 생산한다.” 이야기가 인간 삶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이라는 것이다.

우세한 책들

장윤미 지음 | 사람in | 380쪽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와 만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도 한 장 없이 낯선 길에 들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확실한 안내지도를 얻는다면? 심지어 그것이 보물지도라면? 이 책이 바로 그러하다. 이 책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칼럼에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온 평론가이자 작가인 저자의 깊은 사유와 예리한 통찰을 담았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지나 지음 | 돌베개 | 280쪽

25년 경력의 교사이자 청소년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빈곤가정에서 자란 여덟 명의 아이들과 10여 년간 만남을 지속하면서 가난한 청소년이 청년이 되면서 처하게 되는 문제, 우리 사회의 교육·노동·복지가 맞물리는 지점을 적극적으로 탐사한다. 이 책은 가난을 둘러싼 겹겹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해부이자 날카로운 정책 제안이다.

명상록 수업

피에르 아도 지음 | 이세진 옮김 | 복복서가 | 460쪽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을 쓰면서 자기 안에 혼란스러운 정념이 미치지 못할 성채를 쌓았다. 하지만 평온이 지배하는 이 ‘내면의 성채’는 철학자-황제가 초월적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처박히는 상아탑이 아니라, 시야가 넓게 펼쳐지는 높은 곳인 동시에 멀리 보고 정확히 행동하기 위한 작전기지였다.

별의 무덤을 본 사람들

크리스 임피 지음 | 김준한 옮김 | 시공사 | 420쪽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블랙홀 연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논한다. 갈릴레이가 천체망원경을 고안한 이래, 수많은 과학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 미지의 천체를 추적해왔다. 우리는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검은 천체를 좇아 무모한 모험을 떠나고 기약 없는 연구를 기꺼이 감내한 과학자들을 만날 것이다.

동북아, 니체를 읽다

김정현 엮음 | 김현주 외 3인 옮김 | 책세상 | 272쪽

이 책은 러시아, 일본, 중국, 대한제국과 식민지 조선 등 동북아시아에 20세기 초를 전후해 니체 사상이 처음 수용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주요 텍스트를 번역해서 엮은 것이다. 동북아시아 각 지역 국가에서 니체가 처음으로 수용되는 지점에 있거나 다른 국가로 전이되고 영향을 주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글을 선별했다.

종교적 여가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 김효신 옮김 | 나남 | 304쪽

14세기 이탈리아의 계관시인이자 ‘인문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저자의 대표적인 산문작품 세 권이 번역 출간됐다. 고대문화의 부흥을 꿈꾼 최초의 르네상스인 그는 위대한 서정시인인 동시에 독창적인 산문 작가로서 당대에 명성이 높았던 인물이다. 페트라르카 산문의 정수이자,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분야별 신간

정치-사회

맘카페라는 세계 | 정지섭 지음 | 사이드웨이 | 324쪽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 이소연 지음 | 돌고래 | 324쪽

정부의 예산, 결산 분석과 감시 | 조일출 지음 | 모아북스 | 264쪽

정의로운 도시를 꿈꾸며 | 윤현석 지음 | 한울아카데미 | 336쪽

한미동맹의 디지털 전환 | 서울대학교 미래전연구센터 외 10인 지음 | 한울아카데미 | 328쪽

인문

고독한 생활 |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 김효신 옮김 | 나남 | 312쪽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88쪽

나의 비밀 |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 김효신 옮김 | 나남 | 248쪽

보이지 않는 심리를 읽는 마음사전 | 김상준 지음 | 보아스 | 368쪽

역사

고려거란전쟁 (상)․(하) | 길승수 지음 | 들녘 | 940쪽

우리가 몰랐던 몽골 | 장재혁 지음 | HUINE | 256쪽

과학

우리는 이미 플랜트 엔지니어링을 알고 있다 | 박정호 지음 | 플루토 | 240쪽

예술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 정여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372쪽

문학-에세이

빛과 이름 | 성기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40쪽

사랑의 위대한 승리일 뿐 | 김솔 지음 | 안온북스 | 280쪽

실종자 | 프란츠 카프카 지음 | 이재황 옮김 | 문학동네 | 392쪽

요로감염 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 여는 이정원 이화여대 의과대학 교수(소아청소년과)

장내 미생물·대사물질로 요로감염 예방한다

휴먼 마이크로바이옴, ‘난치성 치료’ 어디까지 왔나

8 UTI-요로 감염

차세대 신성장 동력으로 ‘휴먼 마이크로바이옴’이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염증성 장질환, 뇌혈관질환 등 난치성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더욱 그렇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미 2건에 대해 상용화를 승인하면서 바이오산업에서의 혁신적 장이 열렸다. <교수신문>은 각 질환별 난치성 치료 현황을 국내 최고 전문가로부터 들어 보고 치료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여덟 번째는 UTI-요로 감염에 대해 이정원 이화여대 의과대학 교수(소아청소년과)·이용승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소아비뇨기과)·박현봉 국립강릉원주대 교수(생물학과)의 최신 연구 현황을 소개한다.

연재 순서

① 염증성 장질환

② 비알콜성 간질환

③ 천식·알레르기

④ 우울·불안·스트레스

⑤ 심바이오틱 융복합의료소재

⑥ 장기 이식-간

⑦ 화농성 한선염 및 중증 여드름

⑧ UTI-요로 감염

⑨ 항암

⑩ 뇌혈관 질환

⑪ 구강·심혈관

⑫ 과민성대장증후군

⑬ 자폐

요로감염은 요로를 구성하는 신장·요관·방광·요도에 미생물이 침범해 발생한다. 염증 유발과 균 증식에 의한 세균뇨와 이에 대한 인체의 면역 반응으로 농뇨·발열 등 다양한 증상을 초래하는 질환이다. 임상양상은 무증상 세균뇨부터 요로 패혈증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흔하게 발생하는 세균감염 중 하나인 요로감염은 대부분 대장균 같은 장내세균이 원인이다.

요로감염은 숙주와 요로감염원 병원체 사이의 상호관계에 의해 나타난다. 요로감염 유발과 진행 과정에서 세균의 독성인자와 숙주의 방어인 자가 중요하게 관여한다. 특히 방광기능이 미숙한 영유아기에 발생하는 요로감염은 선천성 요로기형·세균친화적 요로상피·장내미생물총 불균형과 만성 변비 등 여러 병리기전이 복합적으로 관여해 발생한다. 소아요로감염은 소아에서 가장 흔한 세균질환으로 신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신장 반흔(renal scar)을 형성하고, 고혈압과 말기 신부전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신속한 진단과 적절한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

아울러, 재발성 요로감염과 방광요관역류 등 선천성 신장 기형을 가진 많은 소아에서 요로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장기간 예방적 항생제를 투여한다. 이뿐만 아니라 재발에 따른 잦은 항생제 투여로 ‘병원균의 항생제 내성률’이 증가하고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로감염 치료가 절실하게 대두되고 있다.

여성의 요로감염은 질내 미생물과 연관돼

요로감염은 장내 미생물, 특히 여성의 경우 질내 미생물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장내 미생물과 질내 미생물의 불균형을 개선해 요로 감염을 치료하고 예방하고자 하는 연구들이 보고되고 있다. 일부 연구에서 소아요로감염 환자는 건강한 대조군과 장내 미생물의 차이를 보였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엔테로박터가 보다 풍부했다는 점이다. 이는 장내 마이크로바이옴이 요로감염 발생과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건강한 폐경 전의 여성의 질에는 젖산을 생성하는 젖산균이 군집화돼 있다. 이로써 다른 세균을 억제해 감염을 예방하고 균형적인 질 마이크로바이옴을 유지시킨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이화여대 의과대학 소아청소년과의 이정원·이지현 교수와 이혜림 연구간호사 연구팀은 다수의 소아요로감염과 마이크로바이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대표적으로 소아요로감염 환자에서 건강한 소아에 비해 요로 생식계 젖산균 집락이 유의미하게 낮음을 확인해 요로감염의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아울러, 급성 신우신염 환자에서 유산균 예방치료로 요로감염 재발을 낮추는 것을 확인하는 임상연구를 시행한 바 있다.

왼쪽부터 이화여대 의과대학의 이혜림 연구간호사, 이정원·이지현 교수(소아청소년과)다. 이정원 교수는 소아요로감염 예방과 치료를 위한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치료제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사진=이정원

연구팀은 건강한 소아와 요로감염 환자의 소변과 분변을 비교분석해 예방소재 후보물질을 확보·파악하고자 한다. 마이크로바이옴을 기반으로 요로감염 예방에 영향을 주는 미생물과 대사물질을 발굴해 소아 복잡성·재발성 요로감염 예방을 위한 치료제와 기술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장균 요로감염 동물실험 연구에서 유산균 복합체를 방광 내 주입하였을 때 급성 신우신염을 유의하게 예방한 결과도 알아냈다.

이후 지난해 예비연구에서는 정상 소아와 소아요로감염 환자의 소변 마이크로바이옴 비교분석을 시행했다. 그 결과, 정상 소아와 요로감염 환자군간에 유익균과 병원균의 유의한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요로감염 군에서 균주의 다양성이 정상군에 비해 특히 낮아 균주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이 요로감염의 예방과 치료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유산균은 병원균의 요로상피세포 부착을 억제하고 요로생식계의 정상 세균총을 보강해 요로감염 재발을 예방할 수 있는 자연적인 방법이다. 장기간 사용해도 안전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최근 광범위한 항생제 내성을 보이는 ‘광범위 베타락탐 분해효소’(ESBL: extended spectrum β-lactamase) 양성 대장균 균주의 증가로 인해 요로 감염의 치료효과가 낮아지고, 신장 손상이 커지는 환자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항생제 내성 슈퍼박테리아’ 해결을 위한 새로운 개념의 의약품으로서 항생제를 대체할 수 있는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프로바이오틱스 치료제 개발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질병특화 마이크로바이옴의 요로계 생착

이정원·이지현 교수 연구팀은 산업통상자원부 ‘휴먼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신경인성방광 및 소아 발생요로감염 치료제 및 치료기술개발’ 연구를 연세대, 강릉원주대, 종근당바이오, ㈜비티시너

지와 함께 수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건강한 소아와 요로감염 환자의 소변과 분변을 비교분석해 예방소재 후보물질을 확보·파악하고자 한다. 마이크로바이옴을 기반으로 요로감염 예방에 영향을 주는 미생물과 대사물질을 발굴해 소아 복잡성·재발성 요로감염 예방을 위한 치료제와 기술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마이크로바이옴 시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다. 그러나 소아요로감염 예방에 특화된 연구개발은 전무한 상태이다. 현재 시판 중인 프로바이오틱스 제품이 ‘건강에 좋다’는 일반적인 개념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소아의 복잡형·재발성 요로감염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입증된 질병특화 마이크로바이옴의 요로계 생착을 증진시키는 연구 개발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추가적인 차세대 제품개발의 연결고리가 이어지고, 슈퍼 박테리아나 다제 항생제 내성 병원균의 발생 저하의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종국에는 국민 건강증진과 의료산업 발전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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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바이옴 이용해 방광기능 개선한다

바이오산업 기술개발사업 개요

사업명 휴먼 마이크로바이옴 의약품 제품화

과제명 휴먼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신경인성방광 및 소아 발생 요로감염 치료제 및 치료기술개발

개요 신경인성방광과 소아 발생 요로감염 예방·치료를 위한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치료기술개발과 안전성 검증 및

임상 1상 시험계획서(IND) 신청

주관기관 이화여대(이정원)

공동연구·용역 연세대(이용승), 국립강릉원주대(박현봉), 종근당바이오(박수재), ㈜비티시너지(조희경)

연구기간 2023년 4월 1일 ∼ 2025년 12월 31일(2년 9개월)

기대효과

ㅇ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요로감염 억제 유효균주 기반 치료제 개발

ㅇ 마이크로바이옴을 기반으로 신경인성방광과 소아에서 방광기능에 영향을 주는 미생물·대사물질 발굴

ㅇ 발굴된 미생물을 이용하고 방광기능을 개선해 복잡성요로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치료제 개발

ㅇ 동물실험과 임상연구를 통해 개발된 치료제의 효능과 안전성 검증

ㅇ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신경인성방광 치료제의 제품화 준비와 IND 자료 작성

ㅇ 복잡형·재발성 요로감염 예방을 위한 마이크로바이움 기반 건강기능식품 개발

ㅇ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요로감염 진단과 방광기능 이상 진단 키트 개발

요로감염(UTI: urinary tract infection)은 단순 요로감염과 복잡성 요로감염으로 나뉜다. 복잡성 요로감염은 방광의 기능적·해부학적 이상과 동반되는 요로감염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방광기능이 미성숙한 소아에서 발생하는 소아요로감염, 중추나 말초 신경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신경인성방광의 요로감염, 당뇨성 신경병증 등으로 방광의 기능이 떨어져서 발생하는 만성질환 관련 요로감염, 도뇨관을 삽입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도뇨관(카테터) 관련 요로감염 등이 있다.

복잡성 요로감염은 신장 손상 가능성이 높고, 재발률이 높으며, 장기간 항생제 사용 등으로 항생제 관련 내성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대표적인 난치성 질환이다. 방광기능 저하가 동반되는 복잡성 요로감염은 단순히 장기적 항생제 사용으로 해결될 수 없다. 방광기능을 개선해야 비로소 치료가 될 수 있으며, 향후 재발을 막는 예방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천적 이분척추증이나 후천적 척수손상, 노화로 인한 퇴행성 뇌질환으로 발생하는 신경인성방광은 높은 방광압력과 잦은 요로감염을 통해 신장손상을 일으켜 건강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다. 특히 소변의 자가배출이 불가하거나 요실금을 발생시켜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이들 질환에 대해서는 항콜린성약물·도뇨·방광내 보톡스 주입술·장을 이용한 방광확대수술 등으로 방광기능을 개선하는 치료방법이 사용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치료효과가 제한적이며, 부작용이

많아 치료의 유지가 쉽지 않다.

장내·방광 내 미생물과 배뇨장애 관련성

다른 여러 분야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방광기능과 장내 혹은 방광 내 미생물과 배뇨장애의 관련성을 찾는 연구들이 이루어져 왔다. 빈뇨·급박뇨 등의 증상이 심한 환자들은 대조군에 비해 미생물 분포가 다르거나, 미생물 분포에 따라 항콜린성약물 등 치료제에 증상호전 정도가 다르다는 연구들이 발표되고 있다.

특히 이분척추증이나 척수손상환자에서 장내 미생물의 불균형이 같이 알려지면서, 신경인성방광 환자에서 미생물이식술 등 마이크로바이옴을 이용해 방광기능을 개선하고 요로감염을 감소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2000년대에 척수손상환자에서 락토바실러스람노서스(Lactobacillus rhamnosus) 등의 유산균을 복용함으로써 방광의 염증매개물질을 감소시키는 시도들이 있었다. 마이크로바이옴 개념을 도입해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신경전달물질 생성이 주요 인자

마이크로바이옴이 방광기능에 영향을 주는 기전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밝혀져야 하겠지만, 신경전달물질 생성이 주요 인자로 여겨진다. 구심성신경섬유를 통한 척수후근절 변화, 방광배뇨근의 조직학적 변성 등도 관련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장내미생물이 신경전달물질을 생성한다는

앞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이용승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소아비뇨기과)다. 이 교수는 방광기능에 영향을 끼치는 미생물을 발견해 복잡성 요로감염을 치료하고자 한다. 사진=이용승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과제는 요역동학검사가 포함된 임상시험과 동물실험을 통해 방광기능에 영향을 주는 미생물과 대사물질을 발굴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방광기능을 개선해 복잡성요로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치료제를 개발한다.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장내미생물은 장관(腸管)에서 단쇄지방산을 생성한다. 이는 장내로 흡수돼 장내신경다발에서 아세틸콜린과 산화질소 등 여러 가지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한다. 이때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과 방광 기능의 관련성이 주목받고 있다. 방광의 수축과 이완도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이뤄진다. 실제로 아세틸콜린은 방광의 수축에 관여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이다. 방광의 수축을 억제하기 위한 항콜린성 약물은 배뇨장애 치료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약물이기도 하다.

방광은 삶의 질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전 세계에 배뇨장애 질환 환자의 수는 2억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매년 11.4%의 증가율을 나타낸다. 특히 의약품 시장규모는 105억 달러(약 13조7천550억 원)에 달하는데, 새로운 치료방법 개발은 정체돼 있는 상태이다.

새로운 치료방법 개발 정체 상태

마이크로바이옴과 방광기능의 관련성이 주목을 받아오면서도 획기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은 ‘방광기능 평가’의 어려움에 큰 원인이 있다. 방광기능은 단순하게 평가할 수 없으며, 소변의 저장과 배출에 관련된 다양한 인자들에 대해 분석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요역동학검사가 필수다. 하지만 요역동학검사는

침습적이고, 특히 동물실험이 쉽지 않아 이 검사를 바탕으로 한 마이크로바이옴 연구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산업통상자원부의 ‘휴먼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신경인성방광 및 소아 발생 요로감염 치료제 및 치료기술개발’은 요역동학검사가 포함된 임상시험과 동물실험을 통해 방광기능에 영향을 주는 미생물과 대사물질을 발굴하고자 한다. 이를 토대로 방광기능을 개선해 복잡성요로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마이크로바이옴 기반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것이다.

이용승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소아비뇨기과)

마이크로바이옴 생산 ‘대사체’로 치료제 개발한다

대사체(Metabolite)라는 용어는 의약품·농업·식품·환경·생태 등 여러 연구분야에 걸쳐 비교적 평이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그 정의는 꽤 복잡한 의미를 담고 있다. 사전에서 대사체는 유기체 내 여러 물질대사 과정으로부터 유래하는 중간물질 또는 최종산물로 정의된다. 간단히 말해, 생체 내 대사경로를 통해 생합성되는 유기분자 가운데, 특히 저분자 화학물질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대사체는 유기체의 성장·발달·생식과 같은 필수 생명현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1차 대사체군, 이러한 현상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지만 매우 중요한 생태학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2차 대사체군으로 크게 분류된다. 유기체는 처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나 서로 간의 공존을 위해 그리고 생물종 간 화학적 공격과 방어 기작을 위해 2차 대사체를 생산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대사체의 생리화학적 특성으로 인해 식물·동물·미생물 유래 대사체는 인간의 질병 치료를 위한 의약품 개발에 무수히 많은 화학적 소재를 제공해오고 있다.

예를 들면, 최초의 항생제로 개발된 페니실린을 비롯해, 반코마이신 등을 포함한 대다수 항생제 의약품들은 미생물로부터 유래한 대사체를 기반으로 한다. 버드나무 껍질에서 유래해 소염진통제로 사용되고 있는 아스피린을 포함해 항암치료제 탁솔과 항말라리아 치료제인 아르테미시닌은 주목나무껍질 그리고 개똥쑥이라는 식물에서 유래한 대사체를 기반으로 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09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해 호흡기 질환을 일으킨 H1N1 인플루엔자(신종 인플루엔자) A의 치료제인 항바이러스제 타미플루 또한 팔각회향이라는 식물 대사체 소재 기반이다. 이처럼 식물·동물·미생물 유래 대사체들은 광범위한 생리화학적 효능과 작용기전으로부터 의약품 소재 개발에 매우 중요한 자원이 된다.

“궁극적으로 신경인성방광과 소아에서 방광기능에 영향을 주는 신규 유효 미생물·대사물질을 발굴해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와 잠재적 환자군의 생리학적 상태나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화학적 마커의 개발을 목표로 한다.”

왼쪽에서 첫 번째가 박현봉 국립강릉원주대 교수(생물학과)다. 박 교수 연구팀은 휴먼 마이크로바이옴이 생산하는 대사체를 통해 요로감염 치료제를 개발하고자 한다. 사진=박현봉

현대 분석 기기의 발달과 분석 기술의 고도화와 더불어, 휴먼 마이크로바이옴을 기반으로 한의약품 개발연구에서도 대사체 연구는 기초에서 임상연구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오믹스 시대에 접어들면서 대사체학(Metabolomics)을 도입해 분변·소변·혈장·타액·조직·세포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종류의 생체 시료로부터 표적 대사체군을 유의미하게 분석 통계처리할 수 있게 됐다. 휴먼 메타볼롬과 같은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와 라이브러리를 기반으로 대사체 프로파일이 가능하게 됐다. 질환별

환자군과 정상군 간 대사체 지문 패턴을 확립할 수 있고, 코호트 간 비교분석을 통해 유익한 대사체와 유해한 대사체를 구분할 수도 있다. 또한 항생제와 같은 의약품을 포함한 여러 화학물질의 생체 내 대사과정 분석 또한 가능하다.

기초부터 임상연구에 적용되는 대사체 연구

대사체 연구 분야에서는 미지의 대사체를 표적해 규명하는 대사체 발굴 분야도 존재한다. 이 분야는 꽤 도전적이지만 표적 대사체의 화학적·기능적 특성을 명확하게 규명한다. 전임상과 임

상실험을 위한 대량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궁극적으로 잠재적인 의약품의 원천 소재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휴먼 마이크로바이옴은 효능이 있는 미지의 대사체를 발굴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지만, 아직은 전 세계적으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필자가 소속된 국립강릉원주대 생물학과 연구팀이 감염성 질환 치료를 위한 휴먼 마이크로바이옴 유효물질로서 대사체에 중점을 두는 이유는 지극히 상식적이며 많은 과학적 증거를 기반으로 한다. 첫째, 인체 내에서 유익균은 유해균의 성장

을 억제하고 있다. 이는 몸속에 유익균이 생산하는 천연 항생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익균이 생산하는 천연 항생물질

둘째, 대사체는 휴먼 마이크로바이옴과 인체의 면역체계와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며, 여러 질환과 마이크로바이옴 간 연계성에 대한 분자적 기전을 규명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인체에서 서식하며 생존경쟁하고 있는 마이크로바이옴이 생산하는 대사체는 이미 인체 내에서 그 효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미지의 대사체를 발굴하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질환 특이적인 치료제로서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할 가능성이 높다.

연구팀은 특히 산업통상자원부 과제를 통해 △비표적화 메타볼롬 분석과 코호트에 따른 비교대사체 분석으로부터 신경인성방광·소아 발생 요로감염 특이적인 대사체의 분석·발굴 △질환을 조절하는 효능 미생물 균주로부터 대사체

발굴과 자원 확보 △표적 메타볼롬 프로파일을 활용해 방광기능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다양한 신경전달물질과 단쇄지방산을 포함하는 대사체 군의 유의미적 프로파일 △표적 후보 미생물 균주들의 실험실 내 배양으로부터 표적 대사체의 생산과 화학적·생물학적 기능 규명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신경인성방광과 소아에서 방광기능에 영향을 주는 신규 유효 미생물·대사물질을 발굴해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와 잠재적 환자군의 생리학적 상태나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화학적 마커의 개발을 목표로 한다. 아울러, 방광기능 개선을 통해 요로감염을 치료할 수 있는 마이크로바이옴과 대사체 기반 치료제 개발을 위한 신규 소재 발굴을 하고자 한다.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화될 수 있는 난치성 질환인 신경인성방광과 소아 발생 요로감염 치료제 개발을 위해 연구팀의 실험실은 오늘도 불이 꺼질 줄 모른다.

박현봉

국립강릉원주대 교수(생물학과)

한국의 기형적 계급투쟁, 중산층 박탈감 키운다

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20

구해근 미국 하와이대 명예교수(사회학)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21일 구해근 미국 하와이대 명예교수(사회학)가 「양극화와 중산층 문제」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1강은 양재진 연세대 교수(행정학과)의 「노동과 복지의 현재와 미래」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한국에서 중산층에 관한 얘기는 주로 중산층의 위기 또는 중산층의 몰락에 집중돼 있다. 신문 지상이나 SNS에서 자주 접하는 뉴스는 한국의 중산층이 과거에는 인구의 70% 또는 80%대 까지 됐는데 현재는 40%까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몰락 위기에 있는 중산층을 어떻게 보호하고 과거 수준으로 복원하느냐가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

불행히도 한국은 1997년 외환 위기를 겪게 됐고, 그 이후 중산층의 운명은 급속한 반전을 겪었다. 대량 해고와 명예퇴직·사업 도산으로 많은 중산층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중산층 위치에서 탈락하게 됐고, 노동 시장 유연화 전략이 시행되면서 많은 노동자들이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최근에 와서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40% 정도, 또는 어느 설문 조사에 의하면 20% 정도밖에 안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산층 기준은 무엇일까? 다행히 최근의 한 설문 조사가 여기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매일경제>와 <잡코리아>가 2019년 실시한 설문 조사가 설문 응답자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이상적인 소득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매일경제>, 2019년 10월 28일 자). 이에 대해 가장 많이 응답한 소득 범위는 500만~600만 원이었다. 자택 소유에 관한 질문에서 응답자들은 30~40평 정도의 아파트를 소유하거나 전세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중상층의 주거 조건이라고 답했고, 그것은 당시 시장 가격으로 약 5억 원 정도가 되는 집에서 사는 것을 의미했다.

응답자들은 이런 경제적 소유 이외에도 ‘삶의 질’이 중요하다고 믿었으며, 중산층이라면 한 달에 4번 정도 가족과 외식을 하거나, 1년에 1~2회의 해외여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따라서 대다수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 삶의 기준이 과거보다 훨씬 높아진 것이 확실하다. 2010년 중반 한국의 중위 소득이 월 230만 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들이 생각하는 중산층 기준은 거의 비현실적으로 높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양극화는 한국만이 경험하는 현상이 아니라 현재 거의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경제적 양극화는 우선 최상위층으로 국가의 소득과 자산이 집중되고 나머지 인구의 소득은 침체되는 현상을 지칭한다. 그

러므로 인구의 상위 1%와 하위 99% 사이의 괴리가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사회에서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중산층 개념을 소비 수준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정의해왔다. 남부럽지 않은 수준의 소비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중산층 지위를 유지하는 필수 요건으로 간주돼온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읽을 수 있는 현상이 소위 말하는 ‘명품 열풍’이다. ‘명품’은 원래 이름난 장인이 만든 고품질의 제품을 의미하며 주로 훌륭한 도자기·악기·오디오 등에 붙이던 단어였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유통 시장 개방으로 각종 사치품 수입이 크게 늘어나면서 그중 유명 패션 브랜드를 차별화하기 위해 명품이란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루이비통·구찌·샤넬·에르메스 등 유명 브랜드의 핸드백·구두·의복·액세서리 등이 한국 시장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이 브랜드 제품들의 초기 소유자는 부유층 소비자들이었지만 곧 일반 대중으로 모방 소비가 확산되면서 소위 ‘짝퉁’시장을 발달시키기도 했다.

한국에서 부유 중산층의 등장과 병행해서 일어난 중요한 현상은 강남의 등장이다. 어느 사회나 부유 가정이 밀집된 지역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강남만큼 부유 중산층이 대규모로 한 지역에 밀집해서 살고 있는 지역은 세계에서 보기드문 현상이다.

강남을 얘기할 때 부동산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부동산은 강남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강남의 부동산 가격 상승은 실로 놀라울

“불안은 현재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세대·계층·성·지역·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국민이 불안을 겪으며 살고 있다.

한국의 중산층은 이제 경제적 위치·계급적 이해관계·정치적 성향 면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두 개의 계층 집단으로 분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유 중산층이 원하는 경제정책과 일반 중산층이 원하는 정책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만큼 빠른 속도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강남의 가격이 이렇게 계속 상승한 이유는 이 지역이 주는 특권적 교육 기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명문 고교 이전으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다시 대치동 학원가가 들어서며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그럼으로써 자식의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주한 가정은 비단 자식의 교육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예상치 못했던 큰 혜택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강남은 여러면에서 특권적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심화하는 불평등이, 특히 중산층 내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격차가, 교육 부문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한국은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나라이지만 사실 한국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은 자식이 좋은 지식을 배우고, 교양을 쌓고, 인격을 수양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대접받고 성공하는 데 필요한 학력이나 학벌을 얻는 데에 있다. 즉 부모들의 강한 교육열은 자녀가 명문 대학에 입학해서 좋은 학벌을 성취하기 바라는 욕구를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 사회적 신분과 지위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문화

구해근 미국 하와이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최근의 조국 사태가 한 예이지만,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관 후보들의 각종 비리와 특권 추구 행위는 이것이 한국 특권 중산층의 계층적 문화의 단면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라며 “이러한 한국 특권 중산층의 계급적 행동이 한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본다”라고 설명했다 .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자본이기 때문이다. 학벌은 개인이 대학 입시를 볼 시기에 결정된 후 평생 따라다니는 일종의 신분 증서 같은 역할을 한다. 한번 정해진 학벌은 바뀌지 않고, 또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기도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교육 경쟁은 근본적으로 좋은 학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같은 교육 경쟁이 주로 사교육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한국 가정은 사교육을 위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은 비중의 사교육 비용을 지출한다. 최근 신문 보도에 의하면 한국

가정은 식비와 교통비를 포함한 생활비보다 더 많은 돈을 사교육비에 지불하고 있다. 중산층일수록 학교 교육보다 학원이나 개인 과외 수업에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다.

한국의 사교육과 관련된 가장 큰 문제는 지역별 사교육 기회 차이가 뚜렷하고 그 격차가 점점 더 심각해져간다는 것이다. 서울과 지방이 다르고, 서울의 강남과 강북 사이에도 큰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 사교육 시장을 대표하는 곳은 학원가의 메카라고 불리는 대치동이다.

이렇듯 한국에서 사교육 시장의 기형적 발달은 부유 중산층의 등장과 그들의 계급 세습을 위한 전략과 관련이 있다. 교육은 중산층 모두에게 중요하지만 상위 중산층에게는 특히 중요하다.

한편 진짜 부자에게는 교육이 그렇게 중요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이나 사업체를 자식에게 물려줘서 계급 세습을 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직·관리직 중산층 가정에서는 교육이 계층 세습의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자식의 명문대 입학에 사활을 걸고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사교육 시장이 왜 그렇게 기형적으로 발달했나를 설명

하기 위해서는 단지 정부의 평준화 정책만이 아니라 그것을 우회하기 위해서 부유 중산층이 택한 전략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설사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어도 부유층이 증대하고 그들의 가족 이기적 교육열이 존재하는 한 사교육 시장은 어떤 형태로든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얘기한 것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지난 20~30여 년간 격변하는 경제 속에서 한국의 중산층은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위기를 단지 중산층의 규모가 줄어들거나 그들의 경제 상황이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진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렇게 계급 지형도가 바뀌면서 한국의 중산층은 과거의 동질적이고 유동적이며 사회 안정적 역할을 하는 계층 집단에서 내부적으로 분화되고 상향 이동이 막히고 불안에 가득 찬 계층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불안은 현재 한국 사회를 특징짓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세대·계층·성·지역·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국민이 불안을 겪으며 살고 있다. 한국의 중산층은 이제 경제적 위치나, 계급적 이해관계, 그리고 정치적 성향 면에서 크게 차이가 나는 두 개의 계층 집단으로 분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부유 중산층이 원하는 경제정책과 일반 중산층이 원하는 정책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최근의 조국 사태가 한 예이지만,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관 후보들의 각종 비리와 특권 추구 행위는 이것이 한국 특권 중산층의 계층적 문화의 단면이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이러한 한국 특권 중산층의 계급적 행동이 한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들의 물질주의적이고 가족 이기주의적인 행동은 사회를 좀 더 평등하고 안정된 사회로 만드는 대신, 점점 더 사교육을 통한 교육 경쟁과 세속적 성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는 사회로 몰아가는 역효과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산층 문제를 고민한다면 단지 중산층에서 추락하는 많은 패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재 경제 구조에서 승자로 떠오른 신 상류 중산층의 계급적 이익과 계급 행위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구성 개선된 수소 촉매 만들었다

포스텍·카이스트·KIST 공동 연구팀

수소와 산소만으로 전기를 만드는 수소 연료전지는 친환경 수소 경제의 핵심 기술이다. 이 전지의 양극은 촉매 물질로 덮여있는데, 성능이 좋은 금속은 가격이 비싸고, 저렴한 비귀금속 물질은 내구성이 비교적 낮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 포스텍·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공동 연구팀이 내구성과 경제성 측면에서 모두 합격점을 받을 수 있는 수소 연료전지용 촉매를 만들었다.

최창혁 포스텍 교수(화학과)·김형준 카이스트 교수(화학과)·오형석 한국과학기술연구원박사 공동연구팀은 철-질소-탄소(Fe-N-C) 촉매 성능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을 밝히고, 내구성을 높이기 위한 합성 전략을 제시했다. 이번 연구는 화학·화학공학 분야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 카탈리시스』에 게재됐다.

철을 기반으로 한 철-질소-탄소 촉매는 수소 연료전지에서 값비싼 귀금속 대신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수소차 등에 실제로 적용하면 촉매의

첫 번째 줄 왼쪽이 최창혁 포스텍 교수(화학과)이다. 이외 공동연구에 참여한 연구진이다. 사진=포스텍

열화현상으로 연료전지의 성능이 급격하게 저하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연구팀은 수소 연료전지 구동 중 실시간으로 전극의 열화를 모니터링하는 질량 분석기(ICP-MS) 기반 분석 시스템을 이용했다. 이 시스템으로 촉매의 변화를 추적한 결과, 전지에 전압이 가해지면 촉매를 구성하는 철 이온이 전해질 속으로 용출(涌出)됐다. 그로 인해 활성점 금속인 철의 밀도가 급격하게 감소하며 촉매의 안정성이 낮아져 전지에 흐르는 전류량이 감소했다. 활성점은 촉매에서 특정 화학 반응을 촉진하는 부분을 말한다. 연구팀은 시간에 따른 촉매 활성 감소 원인을 활성점 밀도와 전환빈도의 변화로 밝혀냈다. 전환빈도는 활성점 당 단위시간에 전환되는 분자의 수다.

연구팀은 전지 온도와 기체 조성, 산성도(pH) 등 조건이 철의 용출과 전지 성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다. 그 결과, 온도와 산성도는 용출되는 철의 양을, 기체 조성은 용출된 철 이온의 상(phase)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철-질소-탄소 촉매의 내구성을 개선하기 위한 합성 전략을 제시했다. 연구팀은 철 이온 주변에 안정제 금속 이온을 도입해 활성점 금속인 철의 용출을 효과적으로 완화했다. 그리고, 이를 수소 연료전지 양극에 적용해 전지의 안정성과 내구성을 높임으로써 기술 상용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연구를 이끈 최창혁 교수는 “철-질소-탄소 촉매의 내구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을 명확하게 규명했다”라며 “수소 연료전지를 포함한 다양한 신재생 에너지 분야에서 전지의 효율을 높일 촉매 역할을 하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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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차를 고쳐서 반려차로

딸깍발이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예전부터 옷이든 그릇이든 중고를 즐겨 썼는데 작년 말 처음으로 중고로 차를 샀다. 2007년 귀국할 때 마련해 13만 마일을 달린 모닝을 막내아들한테 물려주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1천300만원 짜리 벤츠를 샀다. 모닝을 끝까지 안 놓으려고 했는데, 아들이 왼쪽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당분간 자동차가 필요한 상황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남편이 기획해온 일이기도 했다.

한국의 부동산 시스템 적응에 실패해 아직도 무주택자면서 아파트를 무덤에 지고 갈 거냐고 대꾸하는 것처럼, 새 차를 살 여력이 되어도 안 사는 것 역시 자동차를 무덤에 들고 갈 거냐는 지조로, 평생 모닝을 데리고 살려 했다.

아들이 안전하게 운전해야 하기 때문에 남편은 겨울방학 동안 모닝을 대대적으로 고쳤다. 팔면 100

만 원도 안 나오는 차를 그보다 더 돈을 들여 환골탈태를 시켰다. 사실 오래된 차라 집 근처만 다녀서 은근 불안했는데, 막상 서울에 가져 간다고 고속도로를 타니 새 차처럼 시원시원하게 잘 나갔다.

고속도로에서 새로 변신한 모닝에 놀라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까지 같이 살아주고 같이 다녀줘서 고맙다 인사하고 앞으로 새 주인이 될 아들한테도 좋은 벗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돌이켜보니 반려견, 반려묘 못지 않은 반려차였다.

상서로운 크리스마스 이브에 새 식구로 들어온 벤츠는 일단 규모나 무게가 너무 차이가 나서 한참을 초보처럼 엉거주춤 운전했다. 남편이 몇 달 동안 하나하나 고쳐가는 사이 이미 두 번 심각하게 자기주도적으로 긁어서 정비소에도 다녀왔다. 흰색인데 진주빛이어서 역시 벤츠는 색깔이 우아하군 했더니, 정비소 아저씨가 오래된 차라 흰색이 변색된 거라 했다. 아하, 벤츠라고 원래부터 우아한 건 아니었구나.

다행히 정비소 역시 중고 전문이어서 수리비가 적게 나왔다. 그럼에도 몇 달 수리하는 사이 꽤 돈이 든 듯한데, 남편 말로는 중고차 가격만큼 수리

하는 데 돈 쓸 걸 예상하고 산 거라 했다. 그래도 새 차에 비하면 한참 저렴해서 나같은 짠순이한테는 적격이다.

사실 벤츠 수리가 진짜 고장을 고치는 게 아니고 10년이 넘는 차라 한번 대대적으로 예방 정비를 하는 것이라 한다. 이번에 이렇게 고치고 나면 모닝처럼 환골탈태를 한다고. 결국 애들이 모두 집을 떠난 후 자동차 정비를 공부하려는 남편의 야심찬 계획의 일부였지만, 새 식구로 들어온 벤츠는 앞으로 긴 시간을 나와 같이 할 반려차로 거듭나는 중이다.

중고차 거래는 경제학 교과서에 소위 레몬마켓이라는 정보비대칭의 대명사로 나온다. 썩은 사과와 달리 불량 중고차는 그 상태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소비자 입장에서 맘 편하게 사기 어려운 것이다. 중고차는 고쳐 쓰는 것이 답인데, 고쳐 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정당들도 고쳐 쓸 수 있을까? 오래되어 진주빛을 띠는 우아함이 가능할까? 제대로 고쳐서 환골탈태해 오래 같이 할 수 있는 반려정당을 하나 만들 수 없을까?

출처=갤러리 숨

갤러리 초대석

「엄마」

이강,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2023

이강 작가 전시회는 오는 24일까지 대전시 유성구 문지로 갤러리 숨에서 열린다. 일요일은 휴관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나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이라 본다. 가끔은 다른 방향을 향하는 내가 힘겹고 아프지만 결국에 자신에게로 다가갈 수밖에 없는 여정. 나를 멋지게 화려하게 치장해서 드러내고 싶지만 멀리 가지 못해 들통나기 마련이고 오만가지 방법을 써봐야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불과 배게 작업은 어린 시절 소녀의 시점에서 이방 저방을 다니며 놀잇감을 찾는 작업이라고 보면 쉽다. 오방색의 화려함과 꽃무늬 벽지에, 화창한 하늘 위로 나르는 듯한 이불은 그야말로 행복했던 순간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시즌 1 작업을 뒤로하고 이제는 시즌 2 작업에 접어들면서 시선이 자개농으로 이동한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 방향을 처음부터 각 잡듯 잡고 시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수도 없는 시행착오로 시시각각 변하는 자신을 따라가기도 벅차기 때문이다. 나의 작업은 중첩에 중첩이나 깊은 철학이나. 사회적․환경적인 거대담론을 원치 않는다. 그저 일상적인 소소한 것에 만족한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신입생 모집에 나서는 교수들…정부가 할 일은 따로 있다

교수논평

학령인구가 감소하면서 대학 교원의 교권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학과 또는 교원 개인별 신입생 모집인원이 교원의 업적평가 항목에 들어가고, 재임용 업적평가와 연봉계약에도 영향을 주는 대학이 있다.

또한 학과 폐지(다음 학년도 신입생 모집 중지)와 폐과(재적생이 없음)와 같은 대학 내 학과 구조조정에 따른 신분상 불이익으로 직권면직처분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경영상 어려움을 이유로 임금을 동결·삭감하고 주당 책임 교수시간을 늘리는 등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기도 한다. 폐교가 되면 직을 잃고, 오랜 기간 동안 체불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러다 보니 대학의 교수들이 신입생 모집 활동에 집중하면서 교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가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고등교육법」 제15조(교직원의 직무) 제2항은 “교원은 학생을 교육·지도하고 학문을 연구하되, 필요한 경우 학칙 또는 정관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교육·지도, 학문연구 또는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연협력촉진에 관한 법률」 제2조 제6호에 따른 산학연협력만을 전담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교원 본연의 임무 외적으로 신입생 모집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수도권 대학부터 서열화되어 있는 대학서열 체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방 사립대학에 근무하는 많은 교원들은 신입생 모집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2018년 11월 29일 대법원 판결(2018다207854)은 대학 교원의 신입생 모집 활동을 부당하다고 보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 이전의 2017년 12월 20일 부산고등법원 판결(2016나57796)에서는 대학 교원의 신입생 모집 활동을 「고등교육법」

제15조 제2항에서 규정한 대학 교원 본연의 임무는 물론이고 그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수 업무라고 보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대법원이 이러한 판결 내용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고등교육법」 제15조 제2항에서 교원 본연의 임무를 밝히고 있지만, 이 조항이 대학 교원으로 하여금 신입생 모집 활동 등 대학의 입학홍보 업무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취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입생 모집 활동이 교원 본연의 임무는 아니지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부수적인 업무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등록금이나 수업료 수입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높은 사립대학의 경우, 신입생 충원과 재학생 규모 유지가 대학의 유지·존립과 학과의 폐지나 통폐합 등에 따른 교원의 지위나 신분보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교원 본연의 임무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다고 판시하였다.

이렇듯 대법원 판결은 교원의 부수적인 업무로 신입생 모집 활동을 포함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교원 본연의 임무를 방해하는 과도한 신입생 모집 활동에 대해 판단하는 내용도 담았다. 즉 해당 사건 대학의 교원 업적평가 항목에서 신입생 모집 실적이 차지하는 비율이 교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를 줄 정도였는지를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법원 판결의 내용을 근거로 대학 교원이 교원 본연의 임무를 더욱 충실하게 하여 교권을 확립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대학 교원과 학교법인 간의 소송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전반적인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구조조정 정책기조, 등록금과 수업료 수입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높은 사립대학의 상황을 전제로 하여 개별 대학의 사적 자치 범주 내에서 판단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원지위법」 제3조(교원 보수의 우대) 제1항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교원의 보수를 특별히 우대하여야 한다”라고 하여 개별 대학의 사적 자치를 넘

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성을 규정한 내용을 담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대법원의 판결과 별개로 개별 대학의 사적 자치 범주를 넘어 학령인구의 감소 상황을 대학의 등록금 의존도를 낮추면서 교육·연구 여건의 질을 높여 교권을 확립하고, 대학서열을 해소하며 고등교육생태계 전반을 건실화시키고, 지방대학을 육성시키는 기회로 삼는 정책이 필요하다. 바로 대학의 공공성 강화이다.

학령인구가 감소해 신입생 모집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지만 OECD와 비교한 우리나라 교원확보율로 보면 학생충원율은 높다. OECD는 교원 1인당 학생 수가 일반대학의 경우 15명, 전문대학의 경우 16명(2018년 기준)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24명, 33명(2020년 기준)이다. OECD 수준으로 개선하려면 일반대학은 학생충원율을 62.5%로, 전문대학은 48.5%로 낮추든지 더 많은 전임교원을 확보해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로 정원미달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수도권 대학부터 정원을 감축하면서 교원확보율을 높이고 교육·연구 여건의 질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 재정지원을 늘리고 대학의 등록금 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 고등교육에 대한 GDP 대비 공교육비 비율 0.7%(2020년 기준) 정도에 불과한 정부 재정지원을 적어도 OECD 평균 1.0% 정도가 되도록 안정적인 고등교육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학 교원의 신분 안정과 교권 확립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서 교원 본연

의 임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홍성학

충북보건과학대 명예교수

전국교수노조 위원장과 교권쟁의실장을 지냈다.

그래서 오늘도 질문한다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철학을 왜 하게 되었나요?”

철학과 내에서도 가끔 듣는 질문이지만, 세상에 철학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학교 밖에서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하면서 사람들은 철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취업이 어려울 것 같아 선택하지 못했다는 고백을 하기도 하고, 철학이 이 시대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은근히 무시하기도 한다. 그들의 숨은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 좀 더 멋들어진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나’를 찾기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나는 오랫동안 남들도 다 이런 이유로 대학원에 진학하는 줄 알았다. 나는 오랜 시간 내가 ‘나’를 연기하고 있다는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는데, 철학을 공부하면 ‘온전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이유로 공부를 시작해서일까? 나는 공부를 하는 내내 어려움을 겪었고, 여전히 겪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는 철학의 오래된 질문이라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미궁에 빠졌다. 철학자들이 개념 만드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들의 개념을 익히면 익힐수록 나의 질문은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석사수료 후 혼돈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학과 행사를 준비하며 거의 20년 전에 퇴임하신 선생님을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선생님께 제일 처음 드린 질문은 “철학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이었다. 선생님께서는 60년 정도 철학을 하셨고, 아직도 매일 공부하고 계시니 이미 깨달으신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를 미궁에서 꺼내줄 실타래 따위는 없음을 선언하는 듯한 답을 하셨다. “철학자들이 답을 말해주지는 않지. 아무리 들여봐도 거기엔 답이 없어.”

선생님 입에서 다음 문장이 나오기 전 그 잠깐 동안 ‘60년을 저렇게 매일 공부하셨는데도 답이 없다 하시면, 내가 이걸 하는 게 맞나?’라는 의문이 스쳤다. 그러나 선생님의 다음 문장 때문에 나는 아직도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 “철학은 답을 찾는 과정이지.”

사실 선생님의 대답은 새로운 게 아니었다. 많은 철학자가 이 비스름한 이야기를 남겼고, 철학과에서는 흔히 유행처럼 회자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이 말이 그

날은 다르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노학자의 생생한 육성은 그동안 내가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었음을 일깨워주었다. ‘온전한 나’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잘못된 전제를 검토하며, 나는 내가 나를 연기한다는 기분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도 꽤 많은 문제가 해소된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질문을 했을 때 ‘진리’라고 여길만한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칠 때 시간을 들이는 부분도 ‘질문하기’이다. ‘어떤 전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는지’, ‘자신이 언어로 표현한 문장이 진짜 의도한 내용이 맞는지’를 함께 검토하다 보면, 아이들의 관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 아이들 스스로도 자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게 된다. 철학을 공부하며 질문을 할수록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품고 있는 질문이 맞는 질문인지 확인하는 과정은 지난하겠지만, 언젠가 우리의 질문이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

에 데려다 줄 것을 믿는다.

강재린

이화여대 철학과 박사수료

이화여대 철학과에서 「프래그머티즘에 기반한 ‘대화적 자아(dialogical self)’ 개념의 철학교육 적용가능성」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철학 교과서(경기도교육청) 집필진으로 참여했으며, 이화여대 철학연구소에서 철학교육프로그램 운영업무를 맡고 있다.

김상돈의 교수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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