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일본> 대학이 55.4%…먼저 지원하고 원칙은 명확히

데이터로 읽는 대학⑩ 일본의 지방대 활성화 정책

‘데이터로 읽는 대학’ 세 번째 주제는 ‘지역대학 위기 극복 방안’이다. 지역대학 위기 극복 방안은 4회에 걸쳐 다룰 예정이다. 일본의 대학구조조정과 지방대 정책, 기업유치로 지역위기를 극복한 해외 사례, 국립대와 사립대의 역할 분담, 지원 방안을 다룬다. 이번 호의 주제는 일본의 대학구조조정과 지방대 활성화 정책이다.

일본은 입학정원 500명 이하인 일반 4년제 소규모 대학이 총 425개교로 전체 대학(767개교)의 55.4%를 차지한다. 대부분이 의료·보건·복지·종교·교양 등 소규모 특성화대학이다.

입학정원 999명 이하의 소규모 대학은 전체 대학의 76.4%를 차지한다. 일본에서는 일부 규모가 큰 사립대학과 국립대학을 제외하면 대부분 소규모 대학인 셈이다. 소규모 대학의 입학정원은 전체의 34.1%이며, 사립대학이 대부분이다.

일본의 사학조성제도는 1970년에 사립대학 등에 대한 경상비 보조금 제도로 시작됐다. 사립대학의 인건비를 포함한 교육연구 관련 경비를 보조했다. 사학재정이 악화돼 사학조성법의 제정 요구가 높아지면서 1975년 의원입법으로 ‘사립학교진흥조성법’이 제정돼 1976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사립학교진흥조성법’에 근거한 ‘사학진흥조성금’은 문부과학성으로부터 업무를 위임받은 일본사립학교진흥·공제사업단을 통해 각 대학에 보조금으로 지원한다.

사립대학에 대한 경상비 지원은 사립대학·단기대학·고등전문학교의 교육·연구조건 유지·향상 및 교육상의 경제적 부담 경감에 기여하고 있다. 경영의 건전성 향상을 위해 사립대학 등의 교육 또는 연구와 관련된 경상비에 대한 보조금도 일본사립학교진흥공제재단을 통해 학교법인에 지원한다.

‘정원 엄격화’ 정책, 초과 입학에는 경상비 삭감

사립대학 등에 대한 경상비 보조금은 ①사립대학(사립대학·단기대학·고등전문학교)의 교육‧연구조건 유지향상, ②학생의 학업 경제적 부담 완화, ③사립대학 등의 경영 건전성 향상을 위해 학교의 경상비를 보조하고 있다. 보조금 지급은 각 학교당 교직원 수와 학생 수에 소정의 단가를 환산한 기준액을 대학의 교육·연구조건 상황에 따라서 차등 배분하는 ‘일반보조금’과 교육·연구에 관한 특색 있는 사업에 배분하는 ‘특별보조금’이 있다.

문부과학성은 교육환경 유지·향상 및 지방 활성화 차원에서 대학 진학자의 대도시권 쏠림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대학 규모별로 정원 초과 기준을 마련했다. 경상비 보조금을 감액하거나 지원하지 않는 ‘정원 엄격화’ 정책을 추진해 초과 입학자에 해당하는 학생경비 경상비 보조금을 삭감한다.

일본의 지방대학 활성화 시책은 지방창생(蒼生)

일본의 규모별 대학 현황

구분학교수비중

소규모대학(2,000명이하)425 55.4%

중규모대학(2,000명b6,000명)223 29.1%

대규모대학(6,000명이상)119 15.5%

총 계767100.0%

재학생 2,000명 이하 기준 소규모대학 현황

재학생수500명 이하501b1,000명1,001b1,500명1,501b2,000명계

학교수110교142교119교54교425개교비중14.3%18.5%15.5%7.0%100.0%

출처: -大学の真の実力情報公開-BOOK(2019).-旺文社

정원창(2021). ‘일본 소규모대학 현황과 지원정책’,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재인용.

종합전략 중에서 지방연계강화 및 지방으로의 인구 흐름 창출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일본 지방대학 활성화 정책의 기본 시책으로 첫째 지역 주체 간 연계 체계 구축, 둘째 지방 특색이 있는 창생을 위한 지방대학 진흥, 셋째 젊은 세대의 고용창출 및 정착, 넷째 지역인재 육성이다.

일본 대학의 구조조정 배경은 우리나라와 유사하다. 수도권(도쿄권) 집중화 현상의 심화, 학령인구(18세)의 급격한 감소 예상, 지방 중소규모 사립대학 중심으로 입학정원 미충족으로 인한 경영 위기 심화, 사립대학 위기가 학생의 학습권 저해 및 교직원·지역사회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예상되고 있다.

교육·연구시스템 다양화가 구조개혁 기본 원칙

일본의 국·공·사립대학 구조개혁의 기본 원칙은 첫째, 대학 교육 및 연구 시스템의 다양성과 유연성 확보, 둘째, 글로벌화·산업구조 개편 등 시대와 사회의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대학의 교육·연구 및 경영의 질 제고, 셋째, 도전하고 노력하는 대학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제도·재정·운영적 지원과 대학 스스로의 개혁을 통한 지속 가능성 유지, 넷째,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대학의 경우 자주적 퇴출 유도, 다섯째,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맞춰 도전하는 사립대학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을 충실히 하고 주체적인 개혁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위기 대학도 연대·통합과 축소·퇴출로 구분

일본 사립대학 구조개혁의 기본 방향은 먼저 위기 대학 중 연대·통합 등으로 경영개선을 시도하는 대학에게 연대·통합 사례를 충실히 제공하고 연대·통합을 위한 경영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규모 축소·퇴출에 해당하는 사립대학에 대해서는 조기 경영진단을 촉진하는 지도를 강화하고, 퇴출 사례를 충실히 제공하며, 규모 축소·퇴출을 위한 경영지원도 제공한다. 이는 한국 대학의 구조조정에 참고 사례로 적절하다고 하겠다.

일본 대학 구조개혁의 실천 전략은 △국립대학 단일법인의 복수대학 운영제 도입, △국·공·사립대학

의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체제 구축, △사립대학의 연대·통합의 유연화 촉진(학부 단위의 사업양도도 포함), △고등교육기관·산업계·지방공공단체 간 항시적 연대 체제 구축이다. 그리고, 한계 대학의 자주적 퇴출을 위한 정부의 대응 시스템 구축을 통해 △경영 위기의 사립대학법인 대응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마련 △경영 위기의 사립대학법인에 대한 정부 기관별 역할 분담 △경영 위기에 놓여 있는 사립대학법인에 대한 문부과학성의 경영지도 강화 체계 구축 △사학사업단의 사립대학법인 ‘경영판단지표’ 활용 체계를 구축했다.

정책 일관성 중요…구조개혁 방향은 명확해야

일본 사례가 한국 사립대학에 주는 시사점은 대학구조개혁의 배경과 관련해 일본과 한국의 유사성이 크고 한국에 적용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일본 대학구조개혁의 주요 특징은 정책의 일관성, 지표의 체계성,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한 다양성, 구조개혁 방향과 절차의 명확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구성원 모두가 수긍할 이런 정책의 일관성과 체계성이 필요하다. 또한, 구조개혁을 위한 적절한 법 정비 및 제정, 원칙 고수와 사회적 책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와 함께 대학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구조개혁을 통한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고 대학 규모 축소·퇴출을 위한 경영지원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2000년 이후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의 위기는 한국과 일본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대학의 자율성을 전제로 한 지역의 소규모 대학에 대한 대학 정책은 정부의 직·간접적인 지원정책과 더불어 지역대학의 주체적인 구조개혁 노력이 함

께 이뤄져야만 지역대학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황인성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사무처장

대학평가와 고등교육 전문가로 교육통계 분석 작업에 참여해 왔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을 거쳐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학정보공시센터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지냈다.

지방대·지역 소멸 핵심은 결국 ‘지역’

“교수·기업·시민단체 동참하는 오피니언 그룹 만들 것”

▶1면에서 이어짐

그는 지금까지의 정부 주도 사업이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며 HK 사업을 언급했다. “공모를 아무리 해봐도, 지원금을 쏟아부어도 사업이 끝난 연구소들은 전부 없어졌다. 포스트 HK 사업에 선정 안 된 대학들은 연구활동을 전혀 못 하고 있다.” 금전적 지원만으로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남 명예교수는 “대학이 자율성과 근본적인 힘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예산만 지원해봤자 길들여진 시스템에서 벗어나질 못한다”며 “돈만 매개로 해서 추진하지 말고 대학 스스로가 지역과 힘을 합쳐 밑바닥부터 생명력을 갖춰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글로컬대학 예비지정 결과에 대해서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번 1차 심사에서는 국립대와 통합대학 위주로 선정했다. 전체 대학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사립대는 대상이 되기도 어려웠다.” 지난달 20일 발표한 교육부 평가 결과에 따르면 예비지정을 받은 통합대학은 모두 국·공립대뿐이었다. 예비지정된 19개 대학 중 사립대는 절반에도 못 미치는 7곳뿐이었다.

“근본적으로 국립대와 사립대가 공존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남명예교수는 고등교육 예산에 대한 국회의 전반적 입법이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만 하더라도 사립대 운영경비 중 일정 부분에 대한 국가지원이 제도화돼 있다. 그렇게 해야만 운영 기반의 토대가 흔들리지 않는다”며 “한국의 대학 재정 지원은 OECD 국가 중 밑바닥”임을 지적했다. “이 문제를 입법으로 해결해 국립대와 사립대가 공존하는 모델을 구상해야 한다.”

그는 “지자체는 대학에 무지하다”며 “지자체에 예산을 넘겨 이런저런 사업을 해봤자 결국 돈 가지고 대학을 갈라내는 식”이라고 주장했다. 지역대학 육성 프로그램의 한계였다. 남 명예교수는 “지역에 생각 있고 뜻있는 교수, 산업체 인사, 시민단체가 집단 지성체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결국 ‘지역’이었다. 부산의 향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남 명예교수는 연구모임을 준비 중이라고 답했다. 윤석열 정부의 핵심 교육 정책인 글로컬대학이 나온 직후 짙어진 지방대학과 지역소멸

제공=시민시대

문제에 대응하고자 모였다고 했다. 교수를 비롯해 산업체 CEO, 시민단체 등을 동참시켜 오피니언 그룹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지역에서 자생적 대안 모색하는 월간 <시민시대>

이러한 움직임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지역에서 자생적 대안을 만들려는 시도는 꾸준히 명맥을 이어 왔다. 남명예교수가 최근 새 편집인을 맡게 된 <시민시대>에서 바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부·울·경 지역 월간지인 <시민시대>는 이번 7월로 통권 463호에 이르렀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이며, 전국에서도 이만큼 오래된 건 많지 않다”라는 남 명예교수의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 역사를 알기 위해선 1979년에 창립된 ‘목요학술회’를 살펴야 한다.

1979년 9월 13일, 문화 토양을 다져 지역을 새롭게 만들고자 부산 지역 대학교수들과 언론인, 의사 등이 모여 목요학술회를 창립했다. 이듬해 11월 6일, 목요학술회의 내용을 담은 학술교양지 <목요문화>가 창간됐다. 남 명예교수는 1980년대 초부터 <목요문화>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95년 7월 6일, 제호를 <목요문화>에서 <시민시대>로 바꿨고 현재에 이르렀다.

<시민시대>는 지난 1월, 부산 10개 대학총장 인터뷰 특집(「지역 대학의 위기 상황과 타개책-대학총장에게 듣다」)을 다루며 부산의 대학이 직면한 위기와 해결책을 이야기했다. 지난 5월부터는 「지방대학, 위기원인과 대안」을 기획해 매호 중이다.

권오혁 부경대 교수(경제학부), 김종한 경성대 교수(경제금융물류학부), 초의수 신라대 교수(사회복지학과), 하태영 동아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김재훈 대구대 교수(경제금융학부)가 「지방대학, 위기원인과 대안」의 필진으로 있으며, 다음 호에도 지방대학 주제를 이어갈 것이라고 <시민시대>는 전했다. 조준태 기자 aim@kyosu.net

1948년 건국론과 건국절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비롯되었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폄훼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하며 빛나는 역사를 재조명하다!친일반민족행위자를 건국 공로자로 r임시정부 100년 고난의 삼만리s둔갑시키려는 1948년 건국론과 건국절의 역사농단을 고발한다!김용달 지음]224쪽]14,800원한시준 지음]416쪽]19,800원한시준 지음]216쪽]12,000원

도서출판04000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19길 52-7 14빌딩 4층 문의]02-725-8806

이메일]KIT8807!IBONBJM.OFU 블로그]CMPH.OBWFS.DPN/KHPOHHBO

2022년 합계출산율 0.78

인구소멸국가 1호, 대한민국의 물음에

100년 전 스웨덴이 답하다!

노벨평화상EBS

노벨경제학상다큐멘터리 K

수상소개

정해진 r공멸s의 미래를 지속가능한 r공존s의 미래로 바꾸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알바 뮈르달h군나르 뮈르달 지음│홍재웅h최정애 옮김│값 24,000원

교육부 라이즈 법제화 시동에 국립대 교수들 반발

‘지방대 육성법’에 라이즈 근거 명시

▶ 1면에서 이어짐

‘지방대학 및 지역균형인재 육성에 관한 법’(이하 지방대 육성법)을 개정해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이하 라이즈)의 법적 근거를 만들고 지역거버넌스도 정비된다. 국가와 지자체 간 계약도 명문화해 라이즈가 지속가능하게 운영될 수 있게 하겠다는 방침이다.

교육부는 지난달 30일 각 대학에 공문을 보내 ‘지방대 육성법’에 대한 의견 제출을 요청했다. ‘지방대 육성법’ 개정 연구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지역 대학과 지자체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검토 중인 법안에는 국가 주도로 진행됐던 지방대와 지역 인재 육성이 지역 주도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다만, 교육부장관은 기본계획 수립을 지원해야 하며 지방자치단체 간 기본계획의 상호조정이 필요할 경우 시·도지사에게 기본계획의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 지자체 기본계획에 교육부장관이 수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 부분에 대해 교육부는 “해당 부분에 대해 지자체로부터 ‘권한을 이양할 것이라면 제대로 이

전국교수연대회의 소속 교수단체들은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교육부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연합회

양하라’라는 의견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지역의 교수 사회에서 아직까지는 지자체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었다”라며 “현재 연구 중인 것은 장관이 지자체장에게 수정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이지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라이즈 센터와 지역고등교육협의회의 근거도 ‘지방대 육성법’에 명시된다. 현재 교육부가 검토중인 법안에서는 지역라이즈센터(전담기관)와 중앙라이즈센터(전문기관)를 모두 교육부장관이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지역라이즈센터는 지역

주도의 대학지원 사업을 관리하고 선정·평가 등을 전담하는 기관이고, 중앙라이즈센터는 라이즈가 체계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이다.

교육부는 이번 의견수렴 과정에서 지역라이즈센터의 경우 “교육부장관이 지정한다면 ‘이제는 지방대 시대’·‘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혁신’이란 국정과제 방향과 맞지 않고, 지자체로부터도 항의가 있었다”라며 “지자체가 이를 지정할 수 있도록 논의 중에 있다”라고 밝혔다.

지역거버넌스가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여러 관련 조직을 지역고등교육협의회로 일원화한다. 교육부는 지역고등교육협의회에 참여하는 인원수와 공동위원장만 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지자체가 조례로 정하도록 할 계획이다. 지역고등교육협의회를 실무적으로 지원하는 조직인 라이즈 실무협의체(가칭)도 현재 안에서 교육부장관이 중앙과 지자체 공무원으로 구성할 수 있도록 했다. 지역성(지역주도·자율), 재정지속성(투자분담), 상호성(상호 간 행정협약)을 통한 지역혁신 추진이 가능하도록 ‘대학지원협약 제도’도 도입한다.

강일구 기자 onenine@kyosu.net

“지자체 권한 이양, 대학에 또 다른 관리자 만드는 것일 뿐”

한국교육행정학회 연차학술대회

라이즈 체계 시행에 따라 대학지원 권한을 받은 지자체는 대학에 지원자가 될 것인가, 또 다른 관리자가 될 것인가. 지자체는 교육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학을 지원할 수 있는가.

지난달 30일 한국교육행정학회 연차학술대회에서 고등교육행정 분야 발표를 맡은 신하영 세명대 교수(교양대학)와 박소영 숙명여대 교수(교육학부)가 던진 질문이다. 두 교수는 그동안 정부의 대학재정지원정책에 나타난 지자체의 역할 변화를 중심으로 RIS사업과 라이즈, 글로컬30 사업을 분석했다.

연구의 핵심 주제는 그간 중앙정부의 지자체에 대한 지원 방식을 봤을 때 라이즈가 안착한 후에도 지자체가 중앙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학을 지역 특색에 맞게 자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두 연구자의 결론은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결국, 대학을 지원하는 근본적인 재원이 중앙정부에서 나오는 상황에서는 지자체가 대학을 지원하는 데 충분한 자율성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연구는 대학을 지원할 근본적 재정은 없는 지자체가 정부 지원을 통해 행·재정지원 권한을 갖는 부분에 주목한다. 대표적인 게 글로컬대학 사

업이다. 해당 사업의 재원은 교육부에서 나오는데, 대학에게는 지자체와도 상당한 협력을 요구한다. 대학 입장에서는 글로컬대학 예산을 집행하는 교육부와 협력의 대상자인 지자체 양쪽 관리자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교육부는 글로컬대학 사업 추진 초기부터 지역과의 협력을 강조했고 예비지정 때도 혁신성과 지역·산업계 등의 협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했다.

신하영 교수는 글로컬대학 사업의 경우 정부가 선정하고 지자체는 지원하는 사업이기에, 대학 입장에선 사업의 주도권을 정부가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지자체가 직접 재정지원을 해주지 않으면서 대학의 생사에 있어서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라며 “대학은 정부 지원사업으로 인해 정부 눈치도 봐야 하지만 이제는 지자체의 눈치도 보게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중앙정부가 글로컬대학 사업에 따라 유도되는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을 지자체에 떠넘겨버리는 그림이 만들어 질 수 있다고도 했다. 라이즈 체계에서는 지자체도 대학지원 권한을 갖게 되기에 구조조정 위기에 몰린 대학에 대해 중앙정부가 “지역에서 해당 대학의 지원을 거부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한을 받은 지자체도 고민스럽다. 지자체 스

스로의 재원이 아니기에 중앙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예산이 내려와도 지자체가 조례에 의거해 자율적으로 쓰게 해줘야 지자체가 대학 지원에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 라이즈 집행을 위한 예산 관련 지침을 엄격하게 만들면 지자체는 자체 원칙과 상관없이 예산을 쓰게 될 수 있다. 이러면 지자체 입장에선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교육부는 지난 2월 인재양성전략회의에서 라이즈를 통해 지자체로 내려보내는 예산이 지역산학협력과 평생·직업교육, 지자체와의 협력이 중요한 대학재정지원사업을 통합해 만든다고 밝혔다. 또한, 대학재정지원사업의 구조·규모의 조정 등을 통해 2025년부터는 교육부 대학재정지원사업 예산의 50% 이상을 지역 주도로 전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교육부는 지자체에게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줄 것인지 연구 중이다.

지자체에 내려가는 재원이 국고이면 기재부에서 예산을 따야 하기에 가이드라인은 촘촘해질 수밖에 없고, 포괄 보조금이나 교부금이면 지자체와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부분이 있기에 지자체와 함께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고 대학에 우려 사항을 전달하는 형식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강일구 기자 onenine@kyosu.net

‘부실·대량 생산’ 민낯 드러낸 ‘한국에서 연구하기’

지식공유연대, 연례 심포지엄 열어

부실 학술지에 투고하기와 영어 논문 쓰기 등 학계의 내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심포지엄이 열렸다. 지식공유연대는 지난 14일 서울 마포에 있는 연구자의 집 R커먼즈 합정에서 ‘한국에서 연구하기’를 주제로 2023 연례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번 심포지엄은 국내 신진 연구자들의 좌담집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문제의식을 확장했다. 신진 연구자의 ‘박사하기’를 넘어 학술 생산·유통의 현실에서 ‘한국에서 연구하기’를 솔직하게 진단하는 자리였다.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센터의 김병준

지식공유연대가 14일 '한국에서 연구하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사진=줌(ZOOM) 화면 캡쳐

박사는 지난해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 실태점검 결과, 등재 취소가 결정된 A학술지의 논문게재 실태를 정량 분석해 부실 학술지의 문제를 비판했다.

2022년 기준 인문사회 학술지는 연평균 30건 이하의 논문을 출판한다. 등재 취소에 이른 A학술지의 지난 한 해 출판 건수는 1천500여 건. A학술지는 10매 이상의 분량에 추가 게재료를 부과해 짧은 분량의 논문을 유도했다. 그 결과 게재 학술지의 평균 분량은 13.7매로, 인문사회과학 논문으로는 상당히 짧은 편이었다. 분량을 줄이기 위해 참고문헌 수도 적게 제시했다. ‘논문 공장화’의 한 양상이었다.

김 박사는 ‘반복 투고’도 지적했다. A학술지가 학회의 관례를 어기고 편집위원을 포함한 투고자들에게 동일 호 복수 게재, 세 번 이상의 연속 게재를 허용했다는 것이다. 기준이 엄격한 학술지들은 편집위원의 투고와 동일 연구자의 반복·연속 게재를 제한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부실’, ‘대량 출판’ 학술지 간 공생관계도 문제였다. A학술지와 또 다른 ‘대량 출판’ 학술지의 논문 저자들은 서로를 인용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A학술지 논문이 많이 인용한 대량 출판 학술지 4종은 모두 최근 1~2년 사이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등재 탈락 판정을 받았다. ‘닫힌 인용 네트워크’를 규제한 것이라고 김 박사는 전했다.

문제는 A학술지와 같은 부실 학술지가 더 존재하고 앞으로도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제도의 결함과 한국 학계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불거진 부실 학술지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김 박사는 한국연구재단 등재지라 안심하지 말고 투고를 지나치게 요청하거나 전문 분야가 뚜렷하지 않으면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찬미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전문위원은 국내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영어 논문을 쓰는

이유와 그 학문적 효과를 분석했다. 대학에 소속된 연구자들은 SCI급 논문을 게재하면 300만 원에서 1천만 원 사이의 장려금을 받으며 인사고과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대학 서열을 결정하는 ‘국제화’ 지표 때문이다.

국내 학자들은 이를 위해 영어 논문을 ‘대량생산’하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의 읽히지 않고, 인용도 되지 않는다고 고 박사는 지적했다. 이런 논문은 SCI급 논문임에도 해당 분야 국내 학술지 인용 순위는 대부분 하위 10% 이하였다.

국제적 소통과 학술교류를 위해 영어 논문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위한 실제적 준비는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학술용어에 대한 표준적인 표기법조차 준비되지 않았다고 고 박사는 말했다. 학술연구를 외국어로만 진행하는 ‘학문의 식민화’도 문제였다.

고 박사는 ‘영어 논문 쓰기’와 함께 ‘한국어로 학문하기’를 정확히 의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의 영어 논문을 영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오픈 플랫폼 등 적극적인 제도적 보완책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조준태 기자 aim@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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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국제학술지에 투고해야 할까?

천하제일연구자대회

㊼ 비판지리학의 실천으로서 국제학술지 논문 쓰기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

SSCI급이라는 사실만으로 채용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논문의 질을 예리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심사과정의 수준이 보다 높아져야 한다.(…)학문후속세대의 전반적 수준이 높아지고, 설령 본인은 국제학술지 논문이 없더라도 학연·지연·학벌과 상관없이 국제학술지 논문을 가지고 있는 학자를 ‘흐림 없는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풍토가 형성되길 희망한다.

박사과정생 시절인 2014년 봄에 처음으로 국제학술지에 내 논문이 게재되었다. 그날 오전 학술지 측으로부터 정식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내가 박사과정을 공부했던 곳은 독일의 본대학교인데, 학교 근처 티베트 식당에서 종종 우리의 수제비와 비슷한 별미를 먹었다. 그날 점심에는 출력한 논문을 들고 티베트 식당으로 향했다. 음식 한 숟가락을 입에 물고, 논문 한 문단을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원생 시절에 읽었던 국제학술지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은 당연히 학자로서 자부심을 가질 일이고, 학계는 그 업적을 존중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병폐도 있다.

각 학문 분야의 특성에 따라 국제학술지보다 국내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나 국문 저서가 보다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학자들에 대한 연구지원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이나 교수를 채용하는 대학에서는 국제학술지를 SSCI급(사회과학), SCIE급(자연과학), A&HCI급(인문학)이라는 등급으로 환원하여 연구자의 역량을 판정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숭배한다. 그 결과, 개별 학문의 고유한 특성과 차이는 간과되고 학문 생태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학문의 신자유주의화라는 불편한 현실이 형성되었다.

나는 국제학술지를 둘러싼 병폐에 대한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국제학술지에 논문 쓰기가 필요하지 않다는 반작용으로 나아가서도 안 된다고 본다. 자연 생태계가 풍요롭고 지속가능하기 위하여 생물다양성이 필요하듯이, 학문 생태계도 다양한 관점과 의견이 경쟁, 순환되어야만 지속가능해진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국제학술지 논문 쓰기와 관련하여 논의되지 않았던 지점에 대한 내 생각을 미래의 희망인 학문후속세대들과 공유하려 한다.

‘어떻게’를 넘어 ‘왜’ 써야 하는지 고민을

국제학술지 열풍에 대한 대응으로서 최근 여러 학회에서 학문후속세대인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실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는 학술행사를 개최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뿐만 아니라 ‘왜’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써야하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찾는 고민을 행사에 담아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비판지리학자가 왜 국제학술지

에 논문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은 국제학술지 논문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는 비판지리학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충돌·투쟁·억압·차별·소외가 어떻게 공간을 매개로 발생하는지를 밝히고, 가능하다면 해결방안까지 모색하는 실천지향적 학문으로 정의한다. 비판지리학자가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써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외부의 시선과 지식에 의해 대상화·타자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내 연구는 대부분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론을 공간적으로 이론화·구체화시키는 작업이었다. 석사과정 시절, 동아시아 국가들의 1970~1980년대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요인으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찰머스 존슨, 로버트 웨이드 등 서구 학자의 저서를 접했다. 특히, 사적 이해관계로부터 거리를 두고 장기적인 국가정책의 추진이 가능한 원인을 설명하고자 제시된 계획 합리성(plan rationality)과 시장의 관리(governing the market)와 같은 개념은 제1세계와 제3세계로 분화된 국제학술 담론구조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동아시아 특수성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내 석사학위논문의 지도교수이기도 한 서울대 지리교육과 박배균 교수를 중심으로 국내 비판지리학 연구자들은 존슨이나 웨이드가 분석한 것처럼 국가관료 이외에 국가 밖 행위자들이 국가정책의 수립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가정에 의문을 가졌다.

해외 학자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어느 지방 상공회의소 창고에서 먼지가 쌓인 국문자료를 발굴하거나 관계자를 찾아 인터뷰를 하면서 국가 밖의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국가정책에 미친 영향을 밝힌 지점을 포착하면서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론을 정초시킨 초기논의의 한계를 확인한 것이다.

제1세계 연구자의 ‘인용의 정치’

그런데 막상 우리의 주장이 담긴 연구논문 몇 편이 국제학술지에 게재된다고 해서 기존의 지배적 학술담론 지형에 눈에 띄는 지각변동을 일으키진 못했다. 제1세계의 유명대학에 소속되고, 국제학술 담론지형의 중심에 위치한 ‘석학’이 된 초기 연구자들과 그들의 논의를 지지하며 마찬가지로 제1세계에 위치한 후속 연구자들이 형성한 인식론적 공동체(epistemic community)에는 자신들 간의 상호 인용을 통해 우리의 주장은 더욱 주변화되는 ‘인용의 정치(the politics of citation)’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2년 전 직장을 통일연구원으로 옮기면서 북한 연구에 집중하게 되면서 해외 학계에서는 포스트 사회주의 접근으로 김정은 시대의 북한을 분석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 시장화 조치와 같은 몇몇 징후가 있었던 것을 바탕으로 북한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를 동유럽과 중국에서 진행된 포스트 사회주의와

동일한 해적학술지에 여러 편을 게재하여 채용심사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게 되는 촌극도 발생한다 . 사진=DALL-E

유사하게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사회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북한에 포스트 사회주의의 옷을 무리하게 입히려는 몰이해는 북한이라는 공간도 대상화시켰다. 그동안 국내 북한학계는 깊이 있는 북한연구를 축적해왔다. 하지만 국제학계와의 소통이 부족해서 외부에 의한 북한의 대상화를 적절히 막아내진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안의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

둘째, 우리 안의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대상화는 해외 학자들에 의해서만 추동되는 것이 아니다. 해외이론에 대한 밀도 있는 성찰 없이 이론과 개념을 신속하게 수입하여 한국 사례에 얄팍하게 적용하는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은 국내학술지에서 쉽게 목격된다.

국내 학계에서 나타나는 해외이론을 국내 사례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는 논문심사과정에서 어느정도 걸러낼 수 있다. 심사과정에서조차 바뀌지 못한다면 개념의 재해석과 맥락화를 하지 못하는 연구자 역량의 한계이리라. 그런데 국제학술지에 성찰 없는 논문이 게재되는 상황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학문의 신자유주의화의 일환으로 촉발된 국제학술지 열풍은 국내외 한국인 연구자로 하여금 충분한 성찰 없이 제1세계 논문 심사자의 입맛에 맞는 논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메피스토의 유혹에 직면하도록 만들었다.

예컨대, 발전주의 국가론의 연구주제는 산업정책뿐만 아니라 도시·환경 등으로 다양해졌지만 초기의 동아시아 발전주의 국가론이 가정하는 신베버주의 시각에서의 국가의 역할과 계획합리성 개념은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다.

비판지리학자는 개인 차원의 연구업적을 늘일 목적으로 기존에 지배적인 서구학술 담론에 편승한 성찰없는 연구를 계속하고 국제학술지의 외피를 씀으로써 해당 연구가 정당화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인 연구자가 국제학술지의 편집장이나 편집위원이라면 특집호 형식으로 의제를 공론화하면서 제1세계 학자에 의한 동아시아 및 한국 연구의 대상화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학계의 주변부에 위치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국제학술지의 논문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국제학술지에 논문업적이 쌓일수록 국제학술지로부터 심사요청도 증가한다. 국내학술지와 달리 적은 액수의 심사비조차 없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된 논문을 읽고 영어로 심사평을 작성해야 하니 당연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렇더라도 개인의 영리를 위해서가 아닌 비판지리학자의 학문적 실천이라는 소명의식을 갖고 심사에 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연구자가 성찰이 부족한 연구를 투고했더라도 심사과정을 거치면서 향상된 논문이 게재되는 고무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대부분 서구 출신의 연구자들이 심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한 명의 심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고무적인 상황을 더욱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내 학계에 국제학술지의 논문 게재 경력을 존중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교수가 아니지만 국제학술지 논문업적이 많다는 이유로 종종 국내외 교수 임용심사에 참여했다. 후보자의 자기소개서나 경력에 큰 차이가 없다면 나는 상식적으로 국제학술지 논문 편수를 우선하여 후보자 순위를 부여했다. 국제학술지에 논문 한 편을 쓰는 것은 연구자의 국제학술 담론과의 소통 능력, 차별적인 분석능력과 같은 학문적 우수성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논문 한 편을 위해 들였던 오랜 시간과 투고 후 심사과정을 일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인내했다는 점에서 학자로서의 성실함도 증명한다.

SSCI급 집착보다 심사과정 수준 높여야

웃프게도 SSCI·SCIE·A&HCI급에 집착하는 국제학술지 열광은 매우 빠른 심사 속도와 높은 게재율, 그리고 비싼 게재료를 요구하는 소위 ‘해적학술지’의 범람을 초래했다. 동일한 해적학술지에 여러 편을 게재하여 채용심사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게 되는 촌극도 발생한다.

앞으로는 SSCI급이라는 사실만으로 채용의 근거로 삼을 것이 아니라 논문의 질을 예리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심사과정의 수준이 보다 높아져야 한다.

가령, 도시 분야의 국제학술지로 『City: Analysis of Urban Change, Theory, Action』이 있다. 이 학술지는 도시연구를 주도하는 세계적인 학술지 중 하나이고, 높은 탈락률로 ‘악명’이 높다. 그런데 SSCI급은 아니다. SSCI급 해적학술지에 10편이 실린 후보자와 『City』에 1편의 논문이 실린 후보자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학문후속세대의 전반적 수준이 높아지고, 설령 본인은 국제학술지 논문이 없더라도 학연·지연·학벌과 상관없이 국제학술지 논문을 가지고 있는 학자를 ‘흐림 없는 눈’으로 평가할 수 있는 풍토가 형성되길 희망한다. 비판지리학자라면 논문에서만 비판이론을 사용하지 않고 논문 밖 일상 세계에서도 논문에서 외친 상식·정의와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런 풍토가 만들어져야만 해외 학계의 지난한 투쟁에 참전하여 버틸 수 있는 연구자층이 두터워지고, 국내 학문생태계도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해진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보이저호와 같은 나의 희미한 신호에 응답할 미래의 학문후속세대의 출현을 간절히 고대해본다.

황진태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 부연구위원

동아시아 맥락에서 도시에 대한 권리, 도시 커먼즈, 위험경관(riskscape), 국가-자연, 인간 너머의 지리학(more-than-human geography)과 같은 개념의 이론화를 선도해온 비판지리학자이다. 『Journal of Cleaner Production』, 『Antipode』, 『Environment and Planning A』, 『Journal of Contemporary Asia』, 『Professional Geographer』 등의 국제학술지 및 단행본에 10여 편의 논문을, 국내학술지에 30여 편의 논문을 실었다. 단독 저서로 『내 고향 서울엔』이 있고, 편서로 『강남 만들기, 강남 따라하기』, 『한반도 에너지 전환』, 『위험도시를 살다』 등이 있다. 연구성과는 지리학계를 넘어 도시 및 환경 분야에 지적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지리학자로는 최초로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에 임용돼 현재 다방면의 북한연구를 수행 중이다. dchjt@naver.com

전국대학언론 기자학교가 열립니다

제30기 기자학교는 오프라인 대면 강의와 함께 제30기 전국 대학언론 기자학교 개최 안내

화상회의 플랫폼 >331을 활용한 온라인 과정을 병행해 진행합니다. ● 기 간 : 2023년 7월 24일(월) b 26일(수)

● 진행방법 : 온오프라인 강의 병행

● 대 상 : 전국 대학신문(영자)〮방송국 현직 기자

지자체, ‘대학교육·행정’ 전문성 확보가 먼저다

저자 인터뷰_『세계의 혁신 대학을 찾아서』(살림터 | 284쪽) 쓴 안문석 전북대 교수

▶1면에서 이어짐

대학이 할 수 있는 대응에 대해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특성화다. 안 교수는 “뭐든 잘하면 좋겠지만,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두 가지 목표를 분명하게 잡고 여기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라며 “미국의 UC(University of California)계열의 대학은 대학마다 한두 가지 분명한 특성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특정 분야에 관한 한 연구와 교육에서 최고로 인정받을 수 있게 분명한 특성화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유학생 유치다. “지구화 시대에 우리 학생도 세계로 진출하고, 우리 대학도 세계 각국에서 유학생을 유치해야 한다.” 안 교수는 “특히 인구가 증가하는 아프리카 남미 등에는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며 “유학생을 유치하는 일을 하면서 해외에 홍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학내 친유학생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유학생 받으면 힘들다’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통계를 보면, 지난해에만 16만 명의 외국인 유학생이 한국에 왔다. 지난해 4월 기준, 전북대에는 64개국, 1천 963명의 유학생이 있다.

특성화와 유학생 유치로 대학 경쟁력 제고

제도적 차원에서는 △규제 제거 △예산 증액 △지방정부의 인식 개선 △지방거점국립대 육성을 통한 수도권 집중화 탈피 △연구중심대학 투자 △비정규직 교수의 처우개선 등이 제시됐다. 우선 대

“대학서열화, 연구중심대학 육성 등에 대해서도 지자체가 충분히 인식하고 대처 방안을 심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지자체가 예산권만 가져온다면 지역 대학 간 나눠먹기식 예산 배분이 되기 십상이다.”

학의 자율권 부여 문제다. 안 교수는 책에서 교육부의 ‘교육국제화역량 인증제’를 지적했다. 유학생의 불법체류율 2%를 넘으면 인증을 취소하거나, 유학생의 60%가 ‘성폭력 예방 및 한국법령 이해교육’을 이수하도록 요건에 포함시킨 것 등이 문제다. 안 교수는 유학생의 불법체류를 예방하거나 교육하기보다는 통제만 하고 비자 받는 절차를 더욱 복잡하게 한 점, 한국인 학생에게는 의무가 아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외국인 학생은 반드시 수료해야 하는 것처럼 하는 게 옳은지 등을 제기했다.

예산도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나라 대학생 1인당 교육비 수준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개국 중에서 30위다. 안 교수는 “초중고 학생은 줄어

안문석 전북대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영국 요크대·워릭대에서 정치학으로 석·박사를 했다. 기자를 역임했다. 2021년부터 올해 초까지 전북대 국제협력처장을 지냈다. 사진=안문석

드는데 오래전 정해진 예산이 그대로 가고 있다”라며 “대학을 살리는 게 지역과 나라를 살리는 길인데 그런 인식이 사회적으로 많이 부족한 것 같

다”라고 아쉬워했다.

대학생 1인당 교육비 38개국 중 30위

지난해 전라북도와 전북대는 지역혁신사업에서 탈락했다. 2020년도에도 떨어졌다. 안 교수는 안일한 태도를 꼬집는다. “지방정부의 인식이 우선 개선돼야 한다. 여전히 상전 노릇하려는 자세부터 고쳐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배울 수 있고, 배워야 전문성이 확보될 수 있다. 지방정부가 고등교육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 없이 교육행정을 하게 되면 대학도 지역사회도 큰 피해를 보게 된다.”

특히 안 교수는 교육부가 대학 재정 지원 권한을 지자체로 넘기려고 하는 것에 대해 “지자체의

교육행정에 대한 전문성 강화라는 전제가 이뤄진 다음에 해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대학교육의 특성, 대학 발전을 위한 필요조건 등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한 다음에 비로소 할 수 있는 일이다.” 안 교수는 책에서 “대학서열화, 연구중심대학 육성 등에 대해서도 지자체가 충분히 인식하고 대처방안을 심구해야 한다”라며 “그러지 않고 지자체가 예산권만 가져온다면 지역 대학 간 나눠먹기식 예산 배분이 되기 십상”이라고 우려했다.

안 교수는 수도권 집중화를 막기 위해 지방거점국립대 집중 육성을 방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거점국립대에 대해 등록금을 무료화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나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는 생활비 장학금까지 제공하는 식으로 집중 지원하면 지역의 우수학생이 굳이 수도권으로 가려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계의 혁신 대학을 찾아서』 마지막에 담긴 다음 문장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대학 행정에 깊숙이 관여하는 동안 절실하게 ‘관은 여전히 세계 조류에 제일 둔감하구나’, ‘아직도 깨어 있지 못하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인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너무 늦지 않게.”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30년 대학평가, 교수를 어떻게 바꾸었나

한국교육학회 학술포럼 김수한 교수 “평가지표가 채용지표로”

대학과 학계를 대상으로 한 지난 30년간의 평가와 순위경쟁을 짚어보고 교수들이 처한 노동환경에 대해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교육학회는 지난 15일 ‘평가 지표는 대학의 연구와 교수를 어떻게 바꾸는가’라는 주제로 제2회 학술포럼을 열고 대학과 교수를 대상으로 한 외부기관의 평가 문제를 환기했다. 맡은 김수한 고려대 교수(사회학과)는 2017년에 진행했던 연구를 최신화해 발표했다.

김 교수는 대학에 대한 외부기관의 평가를 학문 간 불균등과 연구자 내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요인으로 꼽았다. 정부를 비롯해 중앙일보, QS세계대학평가, THE세계대학평가, US뉴스&월드리포트, 상해교통대학 등이 실시하는 평가가 대학의 목적·조직구조·전략·생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대학본부도 이를 수용하고 활용하는 방향으로 대응하면서 그 영향이 개별 연구자의 학문·교육 활동에까지 연쇄적으로 미쳤다는 것이다.

평가기관마다 가중치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연구에 모두 치우쳐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특히, <중앙일보> 평가의 경우 연구지표의 세부항목인 해외저널과 연구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하며 인문사회계열 연구자에게 불리한 여건을 만들었다고 봤다.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연구업적은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연구비와 해외저널 두 가지로 평가했지만, 1999년에는 인문사회분야와 무관한 지표인 지식재산이 추가돼 2022년 들어 연구지표의 21%까지 차지했다.

반면, 2000년 이후 반영된 국내논문은 다른 평가항목에 비해 늦게 포함됐고 반영비율도 낮았다. 2008년~2015년 국내논문의 반영비율은 해외논문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며, 연구비와 지적재산보다 낮은 배정을 받았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연구지표가 자연과학·공학·의학·생명공학 분야에 비해 인문사회분야에게 매우 불리하다고 했다. 학문과 연구의 특성상 이공계는 해외저널에 연구를 게재하는 것이 보다 일반화됐고, 대학본부와 이사회도 이공계를 지원하지만, 인문사회 계열은 대학평가 지표를 높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짚었다.

대학평가 기관이 사용하는 평가지표는 대부분 대학이 신임교원을 선발하는 기준에도 포함돼 있다고 밝혔다. 2015년 전임교원을 선발한 112개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신임교원 채용 때 영어·외국어 강의 능력의

2023년 전임교원 임용기준: 121개 대학 공채 공고

(단위: %)96

838075

41

33

77'-/7'- 언급-QTEGX *EGXSV 전체 대학 상위 30위 기타 대학

평가를 명시하거나, 외국어 능력평가가 면접과정에 포함됐다. 112개 대학 중 64곳(57%)이 신임교원에게 영어강의를 의무적으로 부과하고 있다. 영어강의 요건은 <중앙일보> 대학평가를 기준으로 상위 30위에 속하는 대학의 84%에서 임용공고에 명시하고 있다.

연구업적이 전임교원 채용에도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특히, 국제저널 출판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경향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 교수는 “2015년 공개채용 공고에서 ‘SCI/SSCI 논문’을 명시한 대학이 전체의 73%에 달하며, 이러한 경향은 상위권 대학일수록 두드러진다”라며 “2015년 <중앙일보> 평가 기준으로 상위 30위권에 해당하는 대학의 83%가 공개채용에서 SCI/SSCI를 명시적 선발 기준으로 삼고 있고, 기타 70% 대학도 이런 관행을 따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국제학술지 게재에 대한 우대는 문학·역사·철학 같은 인문분야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2010년대 초반에는 ‘국제학술지 최소 1편’이 사회계열의 최소 조건이었다면 이제는 2편 또는 3편이 임용후보 조건이 됐다. 이공계열에서 요구되는 연구업적 기준도 그사이 훨씬 강화됐다. 주저자 혹은 교신저자로 출판한 SCI/SCIE 최소 편수는 증가했고 임팩트팩터 20% 혹은 10% 이상을 업적으로 인정한다는 공고도 흔하게 발견되고 있다.

이 같은 기준은 임용단계를 넘어 대학교수 전체를 관리하는 인사제도에 근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임교원에 대한 인사제도에도 교수채용에 사용된 기준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평가지표와 밀접하게 연관된 교수임용은 평가순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공과학과에 대해 신규채용을 보류하거나, 비정년 트랙에 한해 채용하기도 한다. 평가순위를 높일 수 있다는 핑계로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단과대학을 통폐합하거나 신규사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강일구 기자 onenine@kyosu.net

‘데이터·알고리즘’ 만난 보건의료…질병 예측하고 약물 추천한다

여성과학기술인 이야기 ㉖ 이정혜 서울대 교수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이 시대 여성과학인 소개 캠페인 ‘She Did it’을 펼치고 있다. <교수신문>은 여성과학기술인이 본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경력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WISET과 공동으로 소개한다. 여성과학기술인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생생한 목소리가 교수 사회에 진심을 담아 전달되길 기대한다. 스물여섯 번째는 이정혜 서울대 교수다.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서울대 대학원 협동과정 기술경영경제정책 전공에서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는 이정혜 교수는 이같이 말한다. 이 교수는 “과학기술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니까 어떤 사람들과 일을 하는지가 중요하다”라며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의미있지만, 그 과정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있어야 결과도 더 크게 와닿는다”라고 강조한다.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과 함께 좋은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인재들이 또다른 누군가에게 선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선순환고리가 계속 만들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인공지능의 핵심인 머신러닝과 딥러닝 알고리즘 개발, 산업 분야의 활용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 맞춤형 당뇨 예측 모델과 생체 나이 추정 딥러닝

모델, 만성골수성백혈병 약물추천 알고리즘 개발 등 보건의료·헬스케어 분야이다. 이 외에도 제조, 항만물류, 환경, 금융등 다양한 분야의 문제들을 연구 주제로 다루고 있다.

당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2형 당뇨는 한번 걸리면 완치가 어렵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다양한 합병증을 일으키는 무서운 만성질환이다. 발병 원인도 유전이나 생활 습관 등 개인마다 다르다. 이 교수는 “개인별 건강 상태에 따라 당뇨 발병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을 개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연구에 네 가지 정보를 활용했다. △나이·성별 등 인구사회학적 정보 △BMI·혈압·혈당량 등 임상학적 정보 △유전자 정보 △대사체 정보. 이 교수는 “이 네 가지 정보가 개인마다 다른 건강 상태를 대변하는 지표”라며 “특정 시점의 건강 상태에 대한 패턴을 학습시킨 모델에 새로운 사람의 건강 정보를 넣어 예측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라고 강조했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걸리면 죽는 병이었다. 그런데 신약이 개발된 후에는 관리만 잘 하면 살 수 있는 병이 되었다. 하지만 약에 따라 부작용이 있다. 그 부작용은 사람들 건강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약을 어떻게 처방하는 지가 매우 중요해졌다.

이 교수는 “현재 의정부 을지대병원에 계시는 김동욱 교수가 이 병의 최고 권위자인데, 운이 좋게도 그분과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라며 “김 교수는 2천 명이 넘는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데이터베이스화해 환자별로 가장 최적화된 약물을 추천하는 모델을 개발했다”라고 말했다. “1차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도 얻었다. 이 연구가 특별한 이유는 내가

하는 연구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대체되지 않는 나만의 연구 개척

초고령화 사회가 돼 가고 있는 요즘, 보건의료·헬스케어는 더욱 각광을 받을 것이다. 이 교수는 “보건의료나 헬스케어 분야에서 고도화된 데이터마이닝,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접목하는 시도는 많지 않아 나만의 연구로 삼기에 적합했다”라며 “양질의 데이터가 많아 데이터마이닝 연구를 접목시키기도 좋아 보였고, 또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평소의 생각과도 잘 맞는 분야”라고 말했다. 의의를 가지고 꾸준히 연구할 수 있는 분야라는 뜻이다.

이 교수는 유니스트(울산과학기술원) 교수로 있을 때 제조, 항만물류, 환경, 금융 등 다양한 부문의 일을 할 기회를 얻었다. 자신을 ‘예스우먼’이라고 하며, 협업에 대해 거의 언제나 동의했다고 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이 교수의 좌우명이다. 그는 힘든 순간이 지나면 뭐든 얻는 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교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이 탐구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라며 “남들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우리 인생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할 수 있는 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만 몰두해도 시간이 짧다”라고 제언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본인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길 바란다. 야심찬 꿈을 갖고, 야심차게 도전하길.”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기계학습 및 지식처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스트 산업공학과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연구실을 맡고 있다.

사진=WISET

새로운 사회 수업의 발견

이종원 지음 | 창비교육 | 220쪽

이 책은 탐구가 어떻게 수업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탐구를 통해 학생들이 어떻게 의미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실증적인 결과물을 사례로 제시하며 설명한다. 탐구를 어떤 방식으로 수업에 접목할 수 있을까. 저자가 실증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한 수업 방법들을 ‘야외 조사 활동으로서의 탐구’, ‘탐구 기반의 글쓰기’로 나눠 제시했다.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1, 2

오에 겐자부로 지음 | 김현경 옮김 | 은행나무 | 724쪽

지난 3월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저자의 이 책이 은행나무에서 출간된다. 출간 당시 소설가 노마 히로시가 “그간의 오에 겐자부로 소설의 우주 전부를 종합한다”고 평했으며, 작가 스스로 “이번 작품이 지금까지 나의 총결산”이라고 밝혔듯, 젊은 시절 오에 겐자부로의 삶과 이념이 집약된 작품이다.

비욘드 디스럽션, 파괴적 혁신을 넘어

김위찬·르네 마보안 지음 | 권영설 옮김 | 김동재 감수 | 한국경제신문사 | 306쪽

그동안 사람들이 지나치게 집중해온 ‘파괴적 창조’는 소비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가치를 제공하면서도, 기존 산업을 파괴하거나 대체하고 일자리를 없애는 등 사회적 조정비용을 발생시켰다. 즉 긍정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도 가져온 것이다. 진화한 개념인 ‘비파괴적 창조’는 기존의 것을 부수거나 파괴하지 않고 새롭게 혁신하는 것이다.

무위인-되기

이정우 지음 | 그린비 | 432쪽

저자가 이전 저작들에서 언급해 왔던 무위인(無位人)을 본격적으로 논한 책. 존재론과 주체론, 윤리학을 이어서 사유했으며, 전통적인 주-술 구조에 입각해 인간의 현실적 모습을 ‘술어적 주체’로 개념화했다. 주체는 술어들의 집합체지만 고착화되지 않는다. 생성존재론의 관점에서 세계의 본질은 차이생성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도 지음 | 삼인 | 368쪽

이 책은 1945년에 태어나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열세 명의 대한민국 정치지도자들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작가가 자신의 눈에 비친 각 지도자의 면모와 행적을 기록한 정치 에세이다. 33년간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산 교육자이자 <오마이뉴스> 등의 시민기자이기도 한 작가가 본 대로 느낀대로 써 내려갔다.

라 프론테라

김희순 지음 | 앨피 | 404쪽

2018년 11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에는 미 국경 수비대가 쏜 최루탄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도망가는 라틴계 여성과 어린 두 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엄마 손에 끌려 도망치던 어린 소녀들은 디즈니 만화영화 티셔츠를 입고, 바지도 입지 못한 채 기저귀 바람이었다.

스카치가 있어 즐거운 세상

조승원 지음 | 싱긋 | 680쪽

“아무도 안 쓸 것 같다면 더 늙기 전에 나라도 쓰자. 내가 직접 써서 내가 맨 먼저 읽어보자”라는 마음으로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와 『버번 위스키의 모든 것』을 펴낸 술꾼 조승원 기자가 이번에 펴낸 책은 스카치위스키 증류소 탐험기이다. 저자는 이번에는 이미 많은 책이 나와 있는 스카치 위스키에 대한 책을 펴내보고 싶었다.

초인류

김상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380쪽

최근 들어 인공지능, 메타버스, 혼합현실 등 첨단 기술에 관한 관심이 유독 뜨겁다. 이들 기술은 이제 산업의 혁신을 넘어서서 인류의 육체와 정신을 진화시키는 단계에 이르렀다. 생명공학과 나노 기술은 인체의 기능을 증강시키고, 사물인터넷과 로봇은 인간 육체의 활동 범위와 기능을 증대시키고 있다.

지질학

얀 잘라시에비치 지음 | 김정은 옮김 | 김영사 | 216쪽

우리는 지질학에 둘러싸여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질학적 발견에서 비롯한 물질과 에너지 없이는 살아가기 어렵다. 이 책에서는 베게너의 대륙 이동설과 최초의 지질도 제작처럼 지질학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들은 물론 지진파, 지층, 판구조론, 지질연대표, 방사성 연대측정 등 지질학의 기본 개념을 알아본다.

저자가 말하다_『전쟁자본주의의 시간』 김주현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432쪽

‘베트남 전쟁’이 일군 근대화…민간인 학살 직시해야

한국 전쟁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폐허가 된 현실에 절망하는 만큼 전쟁을 낳은 이데올로기를 환멸했다. 반공과 별개로 모든 것을 파탄 낸 이데올로기 자체는 개인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거대한 재난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50년이 흘러 자본의 전적인 지배를 친근하게 받아들이는 우리의 이 친자본주의적 감각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이 책은 그 답을 찾고자 ‘한국의 베트남 전쟁’을 응시했다.

한국 전쟁과 ‘근대화된 조국’ 사이에는

참전 50년, 담론과 재현사에 기입된 민족주의 한국군·베트콩·난민들과 시민평화법정 이후 이야기

우리가 잊은 ‘제2의 한국 전쟁’이 있다. 미국이 연합군을 모으고자 쓴 용어 ‘베트남 전쟁’을 한국은 명명되는 쪽이 어떻게 반응하건 시종 이렇게 명명하며 8년 6개월 동안 전투를 치렀고, 종전 25년 만에 파월 한국군의 전쟁 범죄 문제가 대두했다. 필자는 그것이 모두가 아는 대로 베트남 전쟁을 ‘조국 근대화’의 기회로 잡은 한국의 국민국가적 무의식이 낳은 결과일 뿐 아니라, 한국 전쟁기까지도 불온하지만 ‘사상’의 지위에 있었던 공산주의를 하찮게 여기게 된 심상 지리(Imaginary Geography)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베트남에 참전한 8년 6개월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자본주의를 체험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반공 국민국가의 구성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전쟁자본주의의

시간은 한국뿐 아니라 시간을 두고 통일베트남에서도 작동한다.

현재 한베 양국의 ‘경제적 결속’은 과거의 불편한 관계를 딛고 시작됐다. 2017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 25주년을 맞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은 이래 베트남 학생들은 점점 더 많이 한국에 유학 오고, 다낭은 지금 한국인들의 국민 휴양지가 됐다.

그러나 한편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 한국의 시민단체와 진보 언론은 지난 20여 년 간

베트남 전쟁을 한국의 과거사로 수용하도록 요구해왔다. 이는 굳이 사과를 요구하지 않은 승전국 베트남 정부의 ‘대범한’ 태도와 무관하게 베트남인 피해자들 편에서 한국군이 수행한 작전의 문제성을 직시하자는 시민성의 실천이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흔히 한국의 태평양 전쟁 피해자들에 비견할 때, 국가 책임론은 과거사 해결을 위한 기초 단계인데도 우리는 베트남 정부의 묵인(!) 속에 이 단계를 건너뛰었다.

이 책은 한국의 과거사로서 베트남 전쟁을 응시하며 ‘참전기 한국 대 베트남의 민족주의’를 아시아내셔널리즘의 충돌로 설명했다. ‘제2의 한국 전쟁’인 월남에서 한국인들은 베트남 민족주의와 조우해 한국전쟁과 ‘다른’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을 인

지하면서도 이를 부인하는 모순적인 국민국가적 무의식에 빠져든다. 2장과 3장에서 참전 담론의 변화태를 참전-종전-한베 재수교-2000년–시민평화법정을 전환점으로 삼아 범주화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에는 한국군, 베트콩, 난민이라는 주역들이 있다. ‘황색 거인’ 한국군과 ‘작은 괴물’ 베트콩은 분리될 수없는 쌍이다. 한국군이 황색 거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 타자가 베트콩이었다. 휴전으로 중지된 한국 전쟁의 적색 박멸이 한국군 승전담을 통해 완료되는 담론의 효과를 4장에서 풀어보았다.

초라해진 사회주의가 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다시 사상의 지위를 회복할 때 이제 이들은 친자본적 관료가 돼 있다. 또한 ‘월남 난민’들은 한국의 가부장제 민족주의에 따라 한국 대 베트남의 젠더 구도를 반복하며 한국인이 난민을 대하는 ‘어떤 문법’을 만든다. 1975년 한국에 들어온 베트남 난민들에 관한 서사는 이 책에서 촘촘하게 보고자 한 부분이다.

5장은 2018년 ‘시민평화법정’ 이후의 시간을 다루었다. 시민평화법정은 학살 50주년에 가해국의 시민들이 마련한 귀중한 자리였지만 법정이 남긴 숙제 또한 적지 않았다.

2021년 ‘극단 신세계’가 연극 「별들의 전쟁」에서 이를 ‘가해자의 피해자성’으로 풀어낸 것은 이 문제가 도달한 최근의 수준이며, 한국의 베트남 전쟁 연구자

들이 앞으로 마주할 숙제다.

김주현

인제대 리버럴아츠교육학부 교수

서평_『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396쪽

그는 왜 평생 조교수에 머물렀을까

s한 번 찍히면 영원회 되돌릴 수 없는 곳이 교수사회다. 그래서 비평을 삼가고 주례식 화답만 난무하는 대학이 돼 버렸다. 힘을 잃은 것이다. 과연 왜 그런가를 고민해 보면, 그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는 실감하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 역주행 신화를 쓰고 있는 소설 『스토너』에는 그러한 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치는 모르고 문학만 사랑하던 평범한 스토너 교수는 학과장한테 찍힌 후 퇴직할 때까지 조교수로 머물렀다. 그는 40년 동안 한 대학에서 헌신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했지만, 떠날 때가 되어서야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얻었다.

교수 출신 소설가가 그린 교수의 삶 세간에 화제

인생의 기대·허무 그 종착점에 대한 모두의 이야기

한 교수의 삶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미국 덴버대 교수를 지낸 소설가 존 윌리엄스(1922∼1994)는 미주리대 영문과 조교수 ‘윌리엄 스토너’의 삶을 1965년 소설로 출간했다. 50년 동안 반응이 없던 이 소설은 2010년대 유럽 전역에서 역주행 베스트셀러 신화를 썼다. 국내에도 번역된 지 8년 만에 일시적으로 품귀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신드롬을 형성했다. 『스토너』는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스토너는 농장 일에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농과대학에 갔다. 그런데 스토너는 그곳에서 우연히 영문학 수업을 듣고 매료돼 평생 열정을 바치기로 한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통해 박사학위를 마치고, 대학에서 일자리를 얻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특히 박사를 하는 과정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친한 동료를 잃기도 했다. 그는 전쟁에 나가지 않았다는 자괴감과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스토너가 멘토로 삼은 교수가 있다. 바로 아처 슬론이다. 슬론 교수는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지만, 학생들을 대할 때 왠지 모를 거리를 둔다. 젊은 스토너는 왜슬론 교수가 우울해 보이고 점점 말이 없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의 시간을 견디면서 늙은 스토너는 자신

의 멘토 교수를 차츰 이해한다.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교정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세 군데 있다. 첫째, 스토너가 박사과정 때 친한 동료 두 명과 대학의 본질에 대해 얘기를 나눈 내용이다. “대학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걸세.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대학은 보호시설이야. 아니, 요즘은 그걸 뭐라고 하더라? 요양소. 환자, 노인, 불평분자, 그 밖의 무능력자들을 위한 곳.” 학문의 자유를 위해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세상의 풍파로부터 지켜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는 스토너가 학과장에게 찍히는 장면이다. 동료 교수였던 홀리 로맥스와

사이가 틀어지는 이유는 한 대학원생 때문이었다. 바로 로맥스 교수의 대학원생 찰스 워커가 화근이었다. 로맥스와 워커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로맥스는 나중에 학과장이 된다. 로맥스 교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워커는 스토너의 수업을 청강했다가 부족한 실력이 들통난다. 형편없음을 감추기 위해 냉소만 가득차 있던 워커였다. 이 에피소드는 나중에 워커의 박사학위 심사에까지 이어진다. 이 때문에 스토너는 로맥스와 돌이킬 수없는 사이가 된다.

셋째, 스토너의 마지막 장면이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는 자신에게 여러 차례 묻는다. 평생 지혜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무지한 자신을 발견한 스토너. 자신의 연구와 교육 열정도, 가족에 대한 애정도, 사랑에 대한 기대도 모두 허망한 것이었다. 그나마 남은 것은 자신의 책뿐이었다. “흐릿하게 바랜 그 활자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라는 환상은 없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작은 일부가 정말로 그(책) 안에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소설 『스토너』는 스펙터클한 반전이 없지만, 묵직한 한방을 갖고 있다. 그건 바로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인생의 허무와 죽음이라는 종착지, 그리고 이에 대한 태도다.

허무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무엇을 기대하며 살아갈 것인가? 그 질문에 과연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특히 그 과정에서 견디는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준 게 바로 ‘스토너’라 할 수 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저자가 말하다_『정치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 홍성민 지음 | 인간사랑 | 205쪽

운전면허증은 있는데, ‘정치자격증’은 왜 없을까

정치학 사라지고 예언학만 난무하는 한국사회

정치철학 탄탄해야 제대로 된 국가정책이 수립

대선을 앞두고 종편 방송에 출현한 일이 있었다. 제법 깊이 있는 정치논평을 하고 난 말미에 사회자가 “이번 대선에서는 어느 후보가 당선될까요?”라고 질문을 한다. 나는 대답을 못했다. 왜냐하면 정치학자는 점쟁이가 아니니까. 그때 나는 그 사회자가 정치학 공부를 하지 않아서 미숙한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학은 사라지고 예언학만이 난무한다. 하나 더 있다. 나는 30대 후반에 교수가 되어서 학회의 논문심사를 열심히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는 논문심사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논문들이 “안봐도 비디오”이기 때문이다. 거의 비슷한 수준의 내용과 쟁점이 지난 20여 년 동안 반복된다. 정치철학이 다루는 범위가 너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학이나 인문학과 접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면 오히려 불리하다.

매우 조심스러운 평가이지만, 미국 유학에 편중된 우리 현실이 이러한 문제를 더욱 가중시킨다. 사실 내가 프랑스에서 푸코와 부르디외로 박사를 받고 귀국해 취직할 무렵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왜 정치학자가 역사학자인 푸코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로 박사논문을 썼어요?” “이 논문은 정치학 논문이 아닌 거 같아요.” 따위들이다. 푸코가 역사학자이고, 부르디외가

사회학자라고?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분류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고갈되고 학문적 유연성은 엿바꿔 먹은 지 오래다. 이왕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하자. 내가 정년 퇴직하고 나면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중에 루소나푸코의 텍스트를 프랑스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되나? 소수학문(?)을 보호하는 학술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더구나 글쓰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번역 투의 문장들은 정말 참기가 어렵다. 고등학교 때 문장연습은 전혀 하지 않았나? 한국학계에서 정치(철학)가 왜소화되고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학자들 자신에게 있다(물론 나도 포함해서). 재미도 없고,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고, 그냥 텍스트 안에 묶여 지루한 ‘주석달기’만을 반복할 따름이다.

이 책은 예언학으로 격하된 정치학을, 미국중심의 정치학을, 텍스트에 매몰된 정치학을, 바로 세워 보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시작됐다. 본래는 유튜브 방송(‘홍알정’: 홍성민 교수의 알기쉬운 정치철학 이야기)을 먼저 했다. 2021년 10월부터 시작된 방송은 현재 200회를 넘겼다. 이번에 출판된 책은 1회부터 40회까지의 분량에 해당한다. 유튜브 방송은 300회를 넘어 400회로 치달을 것이다. 책은 각 주제별로 40

회 정도로 분류해서 한 권씩 출판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17권을 출판할 계획이다.

그렇다고 유튜브 방송과 책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역시 ‘말하기’와 ‘글쓰기’는 다르다.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 분류를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덕의 정치), 레비나스(사랑의 정치), 마키아벨리(힘의 정치)라는 세 명의 사상가를 집중적으로 다뤘고, 거기에서 파생된 이론가들을 추가했다. 특히 공자, 묵자, 한비자를 보충하여 서양과 동양의 사상을 비교했다.

정치학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기초 문법을 제공하고자 했다. 단어만 나열한다고 영어회화가 되지 않는 것처럼, 정치에 대해 농담만을 나열한다고 정치평론이 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의 기초가 단단해야 반도체 산업이 번창할 수 있는 것처럼, 정치철학의 토대가 탄탄해야 제대로 된 국가정책이 수립할 수 있는 것이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사람도, 운전을 하는 사람도, 공무원을 하는 사람도 모두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면서, 유독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자격증이 없다. 의사를 하던 사람이, 검사를 하던 사람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책이라도 한 권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실에 한 권 보내 볼까? 너무 야무진 꿈인가?

홍성민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비평의 발견_『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 이주희 지음 | 글항아리 | 268쪽

감정부터 기본소득까지…‘차별’을 해부하다

구조적 차별 지속되는 감정 ‘체념·적응·혐오’

문제 해결의 주체는 국가, 고도의 비법은 정치

사회학자 이주희 이화여대 교수는 신작『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한국사회의 차별(혹은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경멸과 폄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차별이 어떻게 사람을 무너뜨리는가’라는 제목 하에 왜 차별이 문제가 되는지를 간략히 다룬 서론(1장)과 이어지는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차별과 관련해 조직(시장과 가족), 국가, 그리고 신념체계(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차별을 구조화하는지 설명한다. 2부는 이러한 구조적 차별이 지속되는 감정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저자는 특별히 체념, 적응, 그리고 혐오라는 세 감정 유형에 주목하는데 이들은 사회적 차별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그것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토대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3부는 이러한 차별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방법으로 차별금지법과 적극적 조치, 기본소득과 기본서비스를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도 명확히 드러나듯 저자에게 차별의 문제는 전적으로 ‘구조’적인 것이며 구조의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몇 년간 큰 사회적 쟁점이 돼 온 젊은 남녀 사이의 갈등의 저변에는 안정적 일자리의 감소라는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적인 가치(지향점)로 주저 없이 ‘평등’을 꼽는다. 다만 이러

한 평등이 일시적이고 별로 이뤄지는 것은 없는 우대조치에 머물러서는 안됨을 강조한다. 대학교육을 포함한 교육기회 평등의 수립이 노동시장에서 나타나는 불평등한 결과를 감내하는 전제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도 명확히 하고 있다. 교육기회 불평등을 넘어 노동시장에서 분배의 불평등 문제에 보다 주목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수능 킬러문항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지닌 관점의 한계를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차별을 만들어내고 공고화하는 행위자(국가, 기업, 개인)들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겠지만 저자는 구조적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핵심적 행위자는 국가임을 강조한다. 사회구조는 결국 법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 바꿔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고도의 장치가 ‘정치’다. 책의 논지 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정치가 이러한 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된다.

이 책의 결론인 ‘자유 대 자유(10장)’에서 저자는 자유와 평등은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구성원들의 보다 평등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보다 넓고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차별 받지 않을 자유”)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최근

적극적 우대조치를 위헌으로 판단한 미국대법원의 판결이 지닌 정치사회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렇듯 한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차별, 그리고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포괄적이면서도 섬세하다. 다만 해결방안으로 제시된 제도들에 대한 구체적 논의의 부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기본소득과 관련된 내용의 경우 다소 원론적·당위적이며 이를 둘러싼 기존의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제한적으로만 언급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어느 수준의 기본소득이 적합하고 가능할지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좀 더 명확히 제시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대중서와 학술서 사이의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 이책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요구는 다소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과학의 고전적인 연구들과 최근 문헌들을 망라한 풍부한 기존 연구의 소개와 이론의 적용,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타난 차별의 모습에 대한 구체적 인용은 저자의 논의에 대한 근거를 제공함과 동시에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일상 경험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각 장들 사이의 유기적 연결성도 매우 높다. 한국사회의 차별과 불평등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정인관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교수

법의 기초

토마스 홉스 지음 | 김용환 옮김 | 아카넷 | 388쪽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리바이어던’ 등으로 알려진 토마스 홉스의 이 책이 국내 최초로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은 『시민론』, 『리바이어던』과 함께 홉스의 정치철학 3부작으로 일컬어지지만, 1982년에 번역된 『리바이어던』, 2013년에 번역된 『시민론』에 비해 여태껏 번역되지 않았다. 『리바이어던』에 비해 덜 유명하고 분량도 가장 적다.

원자 스파이

샘 킨 지음 |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628쪽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과학 이야기꾼인 저자의 다섯 번째 책.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원자폭탄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과학자와 스파이로 구성된 과학 특공대가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 이 책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비밀을 파헤쳐 흥미진진한 대서사시로 들려준다. 연합군의 과학자들은 특수 부대를 만들어 나치 독일의 우라늄 클럽 회원 암살 작전까지 벌였다.

인구 위기

알바 뮈르달·군나르 뮈르달 지음 | 홍재웅·최정애 옮김 | 문예출판사 | 392쪽

스웨덴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알바 뮈르달, 정치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이 공동 집필한 사회과학 명저, 이 책이 국내 최초 스웨덴어 원전 번역으로 출간됐다. 1934년 출간된 이 책은 당시 유럽 최빈국으로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았던 스웨덴의 지속적인 인구감소, 그에 따른 생산성과 생활수준 저하, 저출산 문제를 다룬다.

리더십 게임

짐 에드워즈 지음 | 김윤경 옮김 | 푸른숲 | 312쪽

30여 년간 비즈니스 관련 언론계에 종사하며 10여 개의 미디어 기업을 거쳐 온 저자의 이 책이 푸른숲에서 출간됐다. 작은 무명의 블로그로 시작해 전 세계에 약 600명의 저널리스트를 두고, 총 900명이 넘는 직원이 일하는 세계적인 비즈니스 매거진으로 성장한 〈인사이더> 임원진으로서 저자가 경험하며 터득한 조직 관리 기법이다.

동남아시아로부터 본 근현대 일본

고토 겐이치 지음 | 라경수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 408쪽

일본의 ‘북진’과 ‘남진’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즉, ‘북진’의 대상국들은 일본에 격한 반항이 있었던 반면, ‘남진’의 대상국들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반항이 약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와 관련해 많은 일본인들은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는 사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반면,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소박한 자율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

박홍규 지음 | 살림터 | 328쪽

철학자인 저자는 자율적 삶을 추구했다.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그는 1951년 가톨릭 신자로 자라나 사제 서품을 받는다. 그 후 뉴욕의 보좌신부를 거쳐 30살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대학교 부총장, 1966년에는 멕시코에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를 설립해 저개발지역의 교육에 힘썼지만, 교회와의 갈등 끝에 1969년, 사제직을 버렸다.

우아한 분자

장피에르 소바주 지음 | 강현주 옮김 | 장홍제 감수 | 에코리브르 | 200쪽

이 책에는 소바주 교수팀이 이른 성취와 그가 45년 동안 연구자로서 자연에서 배운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또한 화학자로 최고의 영예인 노벨상을 수상하기까지 열정 가득하고 흥미로운 탐구 일대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그야말로 삶에 대한 찬사이자 호기심에 대한 옹호이다.

나를 돌보는 글쓰기

캐슬린 애덤스 지음 | 신진범 옮김 | 들녘 | 280쪽

저널 글쓰기와 저널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마음속에 응어리져 있으며 우리를 조금씩 쇠약하게 하는” 여러 문제를 종이 위로 옮겨 적는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은 나약함, 본인조차 구체적인 이유를 인지하기 어려운 공포나 두려움, 불안 등을 온전히 마주하기 때문이다.

분야별 신간

정치-사회

MBC의 흑역사 |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348쪽

대한민국 대통령 | 박도 지음 | 삼인 | 368쪽

인구 위기 | 알바 뮈르달·군나르 뮈르달 지음 | 홍재웅·최정애 옮김 | 문예출판사 | 392쪽

과학

우아한 분자 | 장피에르 소바주 지음 | 강현주 옮김 | 장홍제 감수 | 에코리브르 | 200쪽

원자 스파이 | 샘 킨 지음 | 이충호 옮김 | 해나무 | 628쪽

지질학 | 얀 잘라시에비치 지음 | 김정은 옮김 | 김영사 | 216쪽

인문

나를 돌보는 글쓰기 | 캐슬린 애덤스 지음 | 신진범 옮김 | 들녘 | 280쪽

무위인-되기 | 이정우 지음 | 그린비 | 432쪽

법의 기초 | 토마스 홉스 지음 | 김용환 옮김 | 아카넷 | 388쪽

소박한 자율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 | 박홍규 지음 | 살림터 | 328쪽

문학-에세이

만주국 시기 중국소설 | 산딩 외 1명 지음 | 노정은 외 5명 옮김 | 산지니 | 616쪽

좋은 곳에서 만나요 | 이유리 지음 | 안온북스 | 296쪽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1, 2 | 오에 겐자부로 지음 | 김현경 옮김 | 은행나무 | 724쪽

경제-경영

리더십 게임 | 짐 에드워즈 지음 | 김윤경 옮김 | 푸른숲 | 312쪽

비욘드 디스럽션, 파괴적 혁신을 넘어 | 김위찬·르네 마보안 지음 | 권영설 옮김 | 김동재 감수 | 한국경제신문사 | 306쪽

41년 만에 『일리아스』 새 번역 시도한 이준석 방송대 교수(고전그리스문학)

술술 읽는 고전에서 깊이 읽는 고전으로, “캐릭터의 내면 전달하기 위해 표현 고스란히 옮겼다”

서울대 미학과와 대학원 서양고전협동과정을 마치고 스위스 바젤대에서 호메로스 서사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준석 방송대 교수(고전그리스문학·사진)는 고전 연구자인 자신을 가리켜 ‘종자(種子) 보존업자’라고 말한다. 고전(古典)의 속성을 농사와 연관 짓는 그는 자기 대에서 이 명맥이 절대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품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일리아스』(아카넷)를 그의 문체로 번역해 화제다. 고 천병희 단국대 교수가 『일리아스』의 문을 연 지 41년 만이다.

이 교수가 박사학위를 받은 스위스 바젤대는 호메로스 연구의 세계적 명문으로 꼽히는 곳이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그는 「호메로스

의 휴머니티: 『오뒷세이아』의 구혼자 살육을 중심으로」(2016), 「오이디푸스의 언어: 중의와 반의」(2017), 「분노의 서사시, 연민의 서사시 『일리아스』」(2018),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 연구」(2019), 「아레스를 닮은 메넬라오스: 『일리아스』의 내적 포물라 연구」(2020), 「호메로스 문헌학의 위기」(2020) 등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그가 얼마나 호메로스와 『일리아스』에 깊이 매료돼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준석 교수의 『일리아스』 번역으로 이제 한국 인문학계는 ‘천병희본’과 ‘이준석본’ 『일리아스』를 교차하며 넘나들 수 있게 됐다. 이교수의 『일리아스』에 추천사를 쓴 이태수 서

울대 명예교수는 “천병희의 번역은 가독성을 큰 장점으로 가지고 있다. 호메로스를 꼼꼼하게 연구해온 학자 이준석의 번역은 좀더 정확하게 호메로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술술 읽던 데서 저자의 최초 표현의 심층까지 짚어가며 읽는 데로 고전읽기가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면, 이준석본의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교수는 “호메로스가 그리는 캐릭터의 내면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표현을 고스란히 옮기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천병희 교수가 앞서 길을 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교수의 작업은 고전문학(문헌)의 의미에

대한 현재적 성찰인 동시에, 도대체 학자가 어떤 일에 몰두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평가의 관건이 정량이다 보니 장기간의 연구가 녹아든 번역이나 단행본보다는 학회지 논문을 차곡차곡 ‘생산’하고 ‘탑재’해서 승진도 하고 연구비도 확보하는 게 교수들의 일상이다”라고 논문생산주의에 매몰된 학문사회에 숨막혀 하고 있다. 그런 여건에서 호메로스 번역 작업은 트로이아의 벌판 위를 달리는, ‘천사의 품에 안긴 것처럼’(릴케, 『두이노의 비가』) 황홀한 일이었다는 그의 고백은 두고두고 음미할만하다.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 선생님께서는 이 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압도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말씀하셨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또한 이 작품이 현재성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궁금하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진노로 시작해서 헥토르의 장례로 끝나는, 단 며칠간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다. 구전 영웅 서사시와는 달리,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초인적인 무력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대신 아킬레우스의 진노와 연민이라는 정서의 궤적을 따라 이야기를 풀어가고, 그 틀 안에서 불가역의 상실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운명이나 신의 명령 등으로 풀었다면 뻔한 이야기가 됐을 텐데, 아킬레우스는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영웅적인 기백을 충족시키는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다른 희랍신화에서는 아킬레우스에게 초자연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스튁스 강물에 몸을 담가 무적의 몸이 됐다거나, 죽어 하데스(저승)에 가지 않고 낙원으로 옮겨졌다거나 하는 일화들이 그렇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그리는 아킬레우스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조건을 나눠 가진 한 명의 인간이고, 그 정서도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여기서 비롯된 이 작품의 현재성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 844쪽 분량으로, 200자 원고지 3천400매에 이르는 작업이다. 희랍어 원전 번역이어서 더더욱 이삼중의 어려움을 겪으셨을 듯하다. 번역에 소요된 시간이 7년여라고 들었다.

“실제로 번역에 쏟은 시간은 만 2년 반이다. 다만 애초에 계약했던 출판사와 의견 조율이 잘되지 않아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새롭게 계약을 맺은 아카넷과 다시 작업을 진행해 이번에 책이 나오게 됐다. 그 사이에 『오뒷세이아』도 번역할 수 있었으니 아주 허송세월한 건 아니었다.

완전한 몰입 속에서 이뤄지는 작업이었고 하루에 7~8시간 정도 번역만 했다. 나머지 시간에도 늘 내 마음은 트로이아의 벌판 위에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빠져든 일인데 힘든 일이 뭐가 있었겠나. 다만 그러다가 남편, 아빠, 아들 노릇을 소홀히 했으니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 건 맞다. 나야 호메로스와 보낸 시간이, 릴케의 표현을 빌자면 천사의 품에 안긴 것처럼(『두이노의 비가』) 황홀했지만,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고 좋게 말해도 좀돈 사람인 나를 감당해야 했던 가까운 사람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 사실 기존의 번역본을 넘어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는 것 자체가 ‘과감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만의 고유한 고전 번역 문법 지평이 확보돼야 가능한 일이다. 이번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번역의 기준이랄까, 선생님께서 중시하는 고전 번역의 원칙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왜곡 없이 옮기고 싶다는 소망은 모든 번역가의 꿈이다. 고전 번역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는 직역과 의역의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모든 요소 하나하나를 똑바로(直) 일으키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뜻(意)을 전달할 수 있겠냐는 것이 내 입장이다.”

△ 희랍 고전 『일리아스』는 1982년 천병희의 번역으로 그간 폭넓게 읽혀왔다. 번역자 자신이 네차례 개정판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번역본을 낸다는 것은 기존 번역본을 넘어서는 고전의 현재적 의미망을 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기존 번역본의 미덕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무슨 수로 그분의 위업을 평가할 수 있겠나. 그 번역을 둘러싼 가혹했던 환경이나 먼

저 짚어보자. 국가는 청년 천병희를 간첩으로 몰아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이라는 형벌을 안겼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시 일어나셨고, 엄청난 고전 번역을 우리에게 선물로 남기고 가셨다. 그전에는 그런 원전 번역 자체가 없었으니 천 선생님은 크레바스 위에 다리를 놓으신 분이고, 맨손으로 터널을 뚫으신 분이다. 그 길은 선생님이 삶의 길을 내신 궤적과 일치한다. 덕분에 우리도 고전으로 가는 통로를 얻었다. 물론, 엄밀한 고전문헌학의 시선으로 해부해 보면 이런저런 아쉬운 세부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단점으로 치부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 고전번역사의 맥락을 잊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선생님께서 번역을 내놓으셨을 때는 『일리아스』라는 희랍어 제목조차 낯설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독자들이 어떻게든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셨던 것같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교정하셨고, 그 덕에 우리는 위화감 없고 편한 『일리아스』를 읽을 수 있었다.”

△ ‘이준석본’ 『일리아스』는 ‘천병희본’ 『일리아스』와 거의 모든 문장에서 표현을 달리했다. 천병희본과 다른 ‘이준석본’의 특징은 무엇인가?

“2권 1-5행을 보자. 테티스의 간청에 고심하는 제우스가 잠 못 이루며 좋은 방책을 궁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게 그냥 궁리가 아니다. 원문에는 헤아림(phren)을 다해, 심정(thymos)을 다해 어느 쪽이 좋을지 저울질(mermerizein)하는 제우스의 내면이 자세히 그려진다.

또, 여러 조각말(particle)들이 잠든 다른 이들과 깨어 있는 제우스를 대비하는 작지만 중요한 노릇을 해준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몹시 낯설 것이다. 천병희 선생님은 이런 낯섦을 경계해 ‘마음속으로 궁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도로 쉽게 옮기셨고, 조각말은 아주 연하게 옮기셨다. 나는 호메로스가 쓴 표현을 고스란히 옮기려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호메로스가 그리는 캐릭터의 내면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은, 다시 말하지만 천병희 선생님이 미리 길을 내주신 덕분이다.”

△ 고전 번역은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현실적으로 이에 대한 ‘업적 평가’도 들인 품에 비하면 너무 작다. 그러나 한 편의 고전을 두고 다

양한 번역본이 경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고전 번역에서 다양한 번역본이 나올 수 없는 한국 학계나 출판계의 한계도 있지 않겠나?

“경쟁은 좀 심한 말이고, 독서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판본이 나와 서로를 보완해주는 건 좋다고 본다. 나도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을 대체하거나 경쟁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쉽고 빠르게 일별할 수 있는 번역본도 있어야겠고, 자주 멈춰가며 음미해보는 번역본도 있어야 할 것이다. 플라톤 번역에서 천 선생님과 정암학당의 책이 지금 각자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좋은 연구자가 자기 분야의 번역에 몰두할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평가의 관건이 정량이다 보니 장기간의 연구가 녹아든 번역이나 단행본보다는 학회지 논문을 차곡차곡 ‘생산’하고 ‘탑재’해서 승진도 하고 연구비도 확보하는 게 교수의 일상이다. 그러면 뭔가 초심에서 벗어난 자신에 대해 자괴감도 들만 한데, 너도 나도 그걸 ‘업적’이라고 부르며 닐스 보어나 막스 플랑크라도 된 듯이 스스로 위안 삼는다. 내 결과물을 차마 업적이라고는 불러본 적도 없고,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비루하고 못난 내가 그런 데로 말려 들어가는 순간 끝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 곧 『오뒷세이아』도 출간한다고 했다. 호메로스 전공자로서 당연한 작업일 테지만, 그렇더라도 희랍 고전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다면 어려운 일로 보인다. 희랍 고전문학을 오늘의 우리가 읽어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또, 이들 작품을 읽어갈 때 특히 유의해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그게 아무리 대단한 일리아스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 대학 선정 필독도서 100선’ 같은 문구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에 희랍 고전을 읽기도 하지만, 그런 독서가 재미있을 리가 있겠나. 게다가 다들 눈앞의 생계에 녹초가 되어 있는데, 무슨 책을 꼭 읽으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심한 일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호메로스의 속삭임으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때 먼지를 털고 이 작품을 읽으면 그만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나면, 그런 속삭임이 더 자주 들릴 것이다.”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editor@kyosu.net

왜곡 없이 옮기고 싶다는 소망은 모든 번역가의 꿈이다. 고전 번역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는 직역과 의역의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모든 요소 하나하나를 똑바로(直) 일으키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뜻(意)을 전달할 수 있겠냐는 것이 내 입장이다.

지역 전문가를 활용한 ‘공동체 교육’

교수의 지역 자원 활용법

솔직해지자. 대부분의 대학은 서울권 대학이나 지역거점 국립대로 편입학하려는 학생의 이탈을 막을 충분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학 서열화가 분명한 사회에서 급(?)이 더 높은 학교로 옮겨 성공해보겠다는 수험생과 재학생에게 대학은 어떠한 비전을 제시해 설득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교수가 혁신 의지를 갖고 교육 특성화를 위한 실험을 지속적으로 진행해야만, 비로소 학생 설득의 명분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설득의 명분과 설득 과정의 효과는 별개의 문제다. 대학 서열주의와 수도권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학교수의 혁신 의지와 함께 문제 개선을 위한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전제돼야 한다.

교육적 측면에서 지역은 학습자가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서울보다 부족하다. 이러한 문제는 지역의 학생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다. 동명대 광고홍보학과는 부산이라는 지역사회에서 학생을 집단으로 지도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교과 영역 수업을 지역 각 기관 전문가와 함께 진행하는 관산학 협력수업 방식으로 운영해 학생들이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비교과 학생 상담 프로그램인 더블멘토링에 매년 5명 이상의 지역 전문가를 참여시켜 학과 학생들이 지역사회의 전문가와 네트워킹하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방학 때마다 학과와 결합할 지역 전문가 발굴

지금까지 필자의 수업에는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수많은 전문가가 참여했다. 필자는 이들과 함께 수업을 공동으로 운영하거나 멘토링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특히 ‘미디어리터러시의 이해’는 2019년부터 5년째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와 교과목 기획, 강의 계획서 작성, 강의, 학생 과제물(공익광고) 심사, 피드백에 이르는 수업의 전 과정을 함께하고 있는 밀도 높은 협력 수업이다. 수업을 통해 미디어리터러시의 다양한 관점을 학습한 학생들은 교내외 공모전 수상실적이 타 대학 동일 계열 학생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

학과의 교수진은 방학 때마다 학과와 결합할 지역 전문가를 발굴하고, 수업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학생들은 지역사회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전문가를 보며 자신감을 얻었고, 창의적 문제해결 역량을 길렀으며, 때로는 교수보다 더 밀접하게 전문가와 소통하며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곤 했다. 지역사회와 함께 지역의 인재를 길러내는 공동체 교육은 다른 대학에서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적용해 볼 만한 대학교육 혁신 사례다.

필자는 연간 7~8개 학부 과목을 담당한다. 담당 과목 내용에는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수업에는 네 가지 일관된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수업을 특성화하기 위한 과정인 동시에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학과만이 해낼 수 있는 차별적인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기 위

이정기 교수는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언론진흥재단, 해운대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홈앤쇼핑, 홈플러스, 금샘마을도서관, 금샘마을공동체, 레블스튜디오, 알티비피얼라이언스, 미디어지음, 마을미디어연구소, 사회자본연구소, 어반비랩 등에 소속된 다양한 전문가를 수업에 참여시켰다. 이들에게 한 차례의 강의만 맡긴 것이 아니라, 수업에 참여한 전문가들과 수업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함께 기획했다 . 사진출처=이정기

한 과정이다. 네 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연구와 교육의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수업이어야 한다. 연구의 성과가 강의로 이어지고, 강의가 다시 연구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트렌디한 수업을 만들어내는 손쉬운 방법이다.

예컨대 필자는 방학 중 관심을 가지고 진행한 연구주제로 수업을 설계한다. 지난 방학에 배리어프리 관련 논문을 작성했다면 해당 주제로 다음 학기 이론, 기획, 연구방법론 수업을 설계해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학생들은 관련 분야의 최신 트랜드를 학습할 수 있게 되고, 교수는 관련 주제를 학생들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논문 작성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구 성과는 또 다른 수업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매년 새로운 사회적 트랜드를 학습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인권 감수성을 길러주는 수업이어야 한다. 필자는 담당하고 있는 대부분의 수업을 인권이라는 주제와 연결해서 운영한다. 예컨대 1학년 수업에서는 학생들에게 인권 관련 공익광고를 제작하게 하고, 2학년 수업에서는 인권 증진을 위한 기획서를 제작하게 하며 3학년 수업에서는 인권 관련 데이터를 분석하거나 소논문을 작성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커뮤니케이션 관련 일을 하게 될 학생들이 글로벌 시민 역량과 소통 역량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준다. 졸업까지 3과목 이상의 인권 관련 과목을 수강하는 커뮤니케이션학도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역문제 해결하는 ‘러닝 바이 두잉’

셋째, 학생들의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수업이어야 한다. 강의 위주의 수업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지역사회의 전문가와 주민들과 함께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이른바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의 방식으로 수업을 설계한다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문제해결 역량을 높일 수 있다. 학생들이 현장에 나가 많은 시민을 만나고, 전문가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법론을 자연스럽게 학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학생들이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수업은 지역사회가 학과와 학생들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형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형태의 수업을 위해 교수는 수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학생들의 문제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관이나 전문가를 만나 MOU를 체결하는 등의 활동을 진행해야 하고, 수업이 진행되는 중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의 적극적인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넷째, 학생들의 수업 중 활동의 성과가 포트폴리오로 구성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학생들이 기획하고 제작하는 성과의 심층성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이 교수뿐만이 아닌 다양한 전문가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1학년 학생들의 수업 성과는 지역 공공기관의 공모전과 연계해 시상하고, 홈페이지를 통해 공유하고 있고, 2학년 학생들의 수업 성과는 지역 실무자에게 제공하여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3학년 학생들의 수업 성과는 국가기술자격 사회조사분석사 2급 취득, 구글애널리틱스 자격증 취득,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게재 활동과 연계하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학생들의 활동이 각종 언론을 통해 보도되거나 학회발표 때 공유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수업 중 활동이 단순히 학점을 취득하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지역 사회를 위한 활동으로서 자신의 포트

폴리오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인식되도록 하고 있다.

이정기

동명대 미디어대학 광고홍보학과 교수

2014년부터 4년간 한양대 교수학습지원센터 책임연구원(연구교수)으로 교수법, 교육커뮤니케이션을 연구했고, 2018년부터 동명대 광고홍보학과에서 미디어 관련 교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2021년과 2022년 연속으로 수업평가 우수교수상을 받았고, 2019년부터 2021년까지 4번의 강의개선 노트 우수교수상을 받았다. 128편의 논문과 『온라인 대학 교육』, 『대학교육 혁신과 교육 커뮤니케이션』 3부작을 비롯한 26권의 학술저서를 집필했다.

서울과기대 제13대 총장후보에 김동환 교수 1순위

서울과기대 제13대 총장임용후보자에 김동환 교수(기계시스템디자인공학과·사진)가 1순위로 선정됐다. 지난 13일 직선제로 열린 총장선거 결과다.

김동환 총장임용후보자는 “서울과기대는 국립종합대학으로서 앞으로도 지역사회와 함께 지속적으로 공생 발전할 것”이라며 “학문간 융·복합 교육과 연구를 장려하고, 교수와 학생, 직원 모든 구성원이 협력하고

소통하는 최고의 대학으로 만들어 가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기계설계학을 전공한 김 교수는 강릉고와 서울대를 나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박사를 했다. 서울과기대 대학·교수평의회 의장과 공학교육혁신 서울과기대 거점센터장, 서울테크노파크 본부장을 지냈다. 현재 대한기계학회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과기대 총장임용후보자추천위원회는 2차 결선투표까지 진행된 결과, 김동환 후보가 실득표수 3천167표를 얻어 1순위에 선정됐다고 밝혔다. 박미정 후보는 실득표수 2천183표를 얻어 2순위에 올랐다.

이번 서울과기대 총장 선거의 선거권자는 교원 422명, 비교원 1만2천154명(직원 415, 조교 49, 학생 1만1천690) 등 총 1만2천576명으로 비교원의 투표반영 비율은 교원 73.53% 대비 26.47%(직원〮조교 18.94%, 학생 7.53%)였다. 제13대 총장의 임기는 현 이동훈 총장 임기만료일 이후인 11월 21일(예정)부터 시작되며 임명일로부터 4년이다.

국민권익위 “국립대 갑질 실태 매년 조사하겠다”

대학별 ‘교직원 행동강령’의 갑질 관련 세부 규정이 보완된다. 국·공립대를 대상으로 하는 갑질 실태조사도 매년 실시할 예정이다. 2019년 46건에서 2021년 86건으로 매년 증가한 국·공립대 내 갑질 신고와 2차 피해 등 끊이지 않는 갑질 문제에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대학별 갑질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사건은 대학별 교직원 행동강령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교직원 행동강령을 공개한 39개 대학 중 14개 대학은 갑질 행위 금지 규정조차 없었으며, 행동강령 내 신고처리 규정도 제각각이었다.

교직원 행동강령에 따르면 대학별 행동강령책임관이 갑질 신고를 처리해야 하나 일부 대학은 아무런 근거 없이 조사·징계 권한 등이 없는 학내 인권센터에 업무를 이관해 처리하기도 했다. 일부 대학은 갑질 신고 전담번호를 운영하는데도 누리집 내 갑질 신고에 대한 안내가 없어 갑질 피해를 신고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혼란과 불편을 줬다.

이에 국민권익위원회는 매년 대학별로 자체 갑질 실태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공표하도록 했다. 대학별 교직원 행동강령에 갑질 행위 금지 규정을 마련하도록 했으며, 위반 시 신고처리 절차, 조사위원회 구성·운영 등 세부 규정을 보완하도록 했다.

지난해 9월 국민권익위가 개최한 대학(원)생 고충 청취 간담회에서 나온 “교육부 등이 대학별 갑질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 이를 지수화하고 공개하면 대학 스스로 자정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는 의견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권익위는 이번에 발표한 ‘대학(원)생 교육·연구활동 갑질 근절 및 권익 보호 방안’을 바탕으로 갑질신고센터 홍보·안내를 강화하고, 갑질 신고에 따른 징계기준을 명확히 해 학내 갑질 근절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전했다. 조준태 기자 aim@kyosu.net

글로컬 오디세이

국유기업 사영화 실험, 중국이 옳았다

박철현

국민대 중국인문사회연구소 HK연구교수

중국 런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관심 분야는 중국 동북지역의 공간생산, 국유기업 노동자, 동북지역의 ‘역사적 사회주의’ 등이다. 주요 저작으로 『다롄연구: 초국적 이동과 지배, 교류의 유산을 찾아서』(공저) 등이 있다.

1978년 이후 개혁기 들어서 중국은 ‘국유기업 개혁’을 시작했다. 개혁기 들어서 기존의 계획경제 및 계급투쟁과 결별을 선언하고 ‘포스

트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경로와 속도를 모색하고 있던 중국에게 국유기업 개혁은 곧 국유기업의 기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1990년대 본격화된 국유기업 개혁은, 상당수 국유기업을 ‘사영화(私營化)’시키는 ‘산업구조 조정’과 주식제를 도입하는 ‘소유권 개혁’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군사, 자동차, 기차, 항공기, 자원, 원자력, 화학, 통신, 조선 등 국가 기간산업 분야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의 국유기업이 사영화됐으며, 살아남은 국유기업의 소유권도 기존 “공장의 주인은 노동자 계급”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규정과 달리 보유량만큼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제로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기존 사회주의 기업을 포스트 사회주의 기업으로 바꾸는 국유기업 개혁은 이렇게 제도적 물질적 전

환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필요로 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로서 국유기업 개혁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산업구조 조정과 소유권 개혁만이 아니라, 포스트 사회주의 국유기업 개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필요로 했다. 중국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사상정치공작’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사상정치공작이란 중국의 국가(공산당-정부)가 직면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위기와 도전을 돌파하기 위해서 공산당원과 주민을 대상으로 전개하는 사상정치에 초점을 맞춘 선전교육 활동을 가리킨다.

사상정치공작은 1949년 건국 이전 혁명운동 과정에서 시작됐고, 건국 이후에도 중공중앙 선전부의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 1978년 이후 개혁기 들어서는 포스트사회주의로의 체제전환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국유기업 노동자를 대상으로 사상정치공작을 교육하고 선전하는 ‘중국 직공사상정치공작 연구회(이하 연구회)’가 1983년 1월 18일 베이징에서 설립됐다. ‘연구회’는 198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시작된 국유기업 개혁 과정에서 대두된 각종 문제들을 국가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에게 분석함으로써 국가 주도 국유기업 개혁 자체를 정당화하고, 나아가서는 포스트 사회주의로의 체제전환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교육선전 활동을 하는 기구였다.

‘연구회’는 학술단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공중앙 선전부에 직속된 이데올로기 선전기구로서, 중앙과 지방의 각종 국유기업은 물론, 각급 공산당과 정부기관에도 설치됐다.

사상정치공작의 주요 내용은, 개혁기 매 시기 국유기업 개

사상정치공작 연구회 홈페이지 화면이다. 기존 사회주의 기업을 포스트 사회주의 기업으로 바꾸는 중국의 국유기업 개혁은 제도적 물질적 전환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전환’을 필요로 했다. 사진=사상정치공작 연구회

혁과 관련해 제기된 주요 문제들이었다. 1980년대 국유기업 개혁에서 주요 문제는 ‘공장장 책임제’였다. ‘공장장 책임제’는, 개혁기 이전 국가 관련 부처가 기업에 가지고 있던 권한을 축소시키고 기업의 생산과 경영을 담당하는 공장장의 권한과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기업의 생산과 경영 효율을 제고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었다. 또한, 앞서 살펴본 1990년대 본격화된 국유기업 개혁 내용인 ‘산업구조 조정’

과 ‘소유권 개혁’, 그 결과 발생한 ‘단위체제’의 해체, 사회주의 ‘공유제 주택’ 제도의 폐지도 국가가 노동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사상정치공작의 주요 내용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의한 중국의 글로벌 자본주의 규범의 본격적 수용과 개혁 과정에서 확대된 지역간, 계층간, 도농간 격차에 저항하는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수호도 국가가 진행해야 하는 사상정치공작의 주요 내용이었다.

국가의 기업에 대한 사상정치공작과 관련해서 2010년대 들어서 제기된 새로운 문제는 곧 디지털 기업의 부상이다.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고, 이 과정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저부가가치 산업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서 자본과 기술력을 축적했고, 이를 기반으로 중국의 정보통신기술(IT) 기업은 급격히 성장했고,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커졌다.

이렇게 디지털 기업의 부상과 경제 전반의 디지털 경제로의 전환과 함께 나타난 플랫폼 노동도 최근 국가가 사상정치공작을 진행하는 주요 내용이다. 플랫폼 노동은 기존과 다른 자본-노동 관계, 고용관계, 노동의 성격 등으로 인해서, 국가의 입장에서는 선도적인 사상정치공작을 통해서 노동자의 의식을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인도해야만 하는 중요한 영역이다.

향후 격변하는 국제정치경제를 배경으로, 공유제 기업, 비공유제 기업에 대한 국가가 사상정치공작을 분석해, 중국의 국가가 어떠한 국가-기업 관계, 국가-노동자 관계를 구축하려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적응과 도태의 갈림길에서

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⑦ 이재민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 1일 이재민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가 「공급망과 국제 정치」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8강은 김종법 대전대 교수(글로벌문화콘텐츠)의 「국제 이주와 난민 문제」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그동안 우리는 ‘패러다임 변화’라는 용어를 여러 측면과 계기에 자주 사용해왔다. 대부분의 경우 이 용어는 수사적인 표현에 가까웠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국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경제 체제 역시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기존의 국제경제 체제를 유지해오던 기본 골격과 원칙이 급속히 바뀌고 있다. 자유 교역과 투자 확대를 모토로 추진되어 왔던 그간의 방정식이 이제는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지금 ‘공급망’ 재편이라는 작업이다.

아마 요즘 언론이나 서적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국제 사회에 대한 새로운 도전 과제의 등장과 이로 인한 국제 관계의 변화가 지금의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그런 변화가 기업과 개인이 활동하는 현장에서 발현되는 현상이 공급망 재편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공급망이란 무엇인가? 공급망은 특정한 상품을 생산하거나 서비스를 산출하거나 디지털 품목을 창출하거나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각각 필요한 구성 요소를 확인·확보·조달하는 국제적 체제를 의미한다.

동일한 국가 내에서 이러한 작업이 이뤄지는 경우도 물론 공급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문제되는 공급망은 여러 국가를 포함해 진행되는 ‘국제적’ 공급망이다.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품목과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는 여러 부품과 구성 요소가 필요하고 이들은 여러 출처와 경로를 통해 확보되고 조달된다. 그리고 이들 출처와 경로는 국제 사회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들을 신속히 찾아내 연결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해 희망하는 상품·서비스·품목·기술을 만들어낸 다음 이들을 국제 사회의 교역 체제에 투입해 여러 목적지로 이동시켜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그간의 국제 교역의 기본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제약이 있어서는 곤란하다.

과거에는 이러한 공급망이 경제적 측면에서만 조망됐다. 어떻게 하면 경제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지에 초점을 두고 공급망이 구성되고 가동됐다.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가장 높은 품질의 부품이나 구성 요소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 공급망 구성에 포함됐다.

또한 이러한 공급망은 상품과 서비스뿐 아니라 디지털 교역에 투입되는 디지털 품목, 그리고 이들 전체에 적용되는 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디지털 품목 산출을 위해서도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부분, 품목을 기획하는 부분, 품목을 제작하는 부분, 제작된 품목을 판매하는 부분, 판매된 부분을 보수하는 부분이 여러 국가에 걸쳐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기술 역시 연구 개발 부분을 서로 나눠 진행하거나, 원천 기술 개발과 응용 부분을 별도로 나눠 운용하는 등 여러 국가에 걸쳐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 역시 이 분야에서 공급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성되던 공급망에 큰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비합리적이고 전체적인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가치와 기준이 뒷받침된다면 여기에 비중을 두고 공급망을 새롭게 구성하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효율의 시대’가 가고 ‘가치의 시대’가 도래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얼마나 효율적으로 신속하게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는 공급망 재편은 기존의 공급망 논의와는 본질적으로 그 궤를 달리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그런 작업이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기여해야 한다. 공급망 재편 관련 문제를 글로벌 중추국가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외교 과제의 핵심 중 하나로 파악하고 접근해야 한다.”

있다. 그동안 한 번도 본격적으로 시도된 적이 없다. 새롭게 출발선에 서 있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다양한 논의와 논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국가 간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먼저 공급망 구성에 있어 경제적 기준에 새로이 ‘가치’ 요소가 추가됨에 따라 이제 보다 입체적이고 고차원적인 평가가 필요하게 됐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는 자유·인권·민주·정의·형평·환경 보호·법의 지배 등 국제 사회가 중요하게 판단하는 여러 원칙과 기준을 말한다.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에서도 이를 반영한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가치’는 추상적인 개념에서는 공감대가 있더라도 이를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증하기가 쉽지 않고, 또한 ‘가치’에 대한 평가는 계량화가 쉽지 않다는 측면에서 이

이재민 서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그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성되던 공급망에 큰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며 “전체적인 효율성이 떨어지더라도 다른 가치와 기준이 뒷받침된다면 여기에 비중을 두고 공급망을 새롭게 구성하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에 기초한 새로운 공급망 구성은 그만큼 어렵고 논쟁을 촉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논의되는 공급망 재편은 단순히 기존 공급망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가치 요소에 대한 추가는 결국 공급망 구성에 있어 국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러 정책과 접점이 생긴다는 점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이 가치는 여러 국가의 외교 정책이나 외교 수단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리나라도 외교에 있어 핵심 가치의 추구를 중요한 수단으로 밝히고 있다. 현재 우리 외교의 기본 목표인 ‘글로벌 중추국가̓의 달성도 바로 이러한 가치 추구를 최우선

으로 내세우고 있다.

미중 분쟁이 격화되며 이제 주요 상품, 서비스, 품목, 기술별로 미국과 중국 중심의 공급망으로 재편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자신들과 가치를 같이하고 신뢰하는 국가와 상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창출하겠다는 시도이다. 자연스레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국가들은 일단 해당 공급망에서 퇴출된다. 특정 영역에서 미국 주도의 공급망과 중국 주도의 공급망이 각각 별도로 존재하게 된다. 일종의 ‘공급망의 파편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전개되는 공급망 재편 논의는 어떠한 상품, 서비스, 품목 및 기술에 대해 진행될지 아직 불투명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일단 지금 가장 첨예한 대립을 초래하는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에서 공급망 재편 논의가 시작됐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이제 다양한 영역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어떠한 항목으로 이어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바로 이러한 불확실성이 기업 입장에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국제 사회의 공급망 재편은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타격을 초래하는 중대한 변화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이다. WTO 164개 회원국 중 6위의 교역국이고 10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대외 교역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높다. 우리 GDP의 약 80%가 대외 교역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역의 근간을 이루는 공급망이 새롭게 조정된다면 우리에게 미치게 될 타격은 상당하다. 쉽게 말하면 그간 우리가 열심히 쫓아가고 익숙해진 기본 원칙이 근본에서부터 바뀐다는 의미이다. 정부도 기업도 그리고 개인도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공급망 재편 문제는 미중 대결, 신냉전 시대, 디지털 전환, 민간 분야 역할 확대라는 국제 사회의 다양한 흐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이러한 흐름은 국제 사회가 이제 새로운 방향으로 진행해 앞으로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큰 변화가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공급망 문제는 이러한 작금의 국제 사회의 변화 움직임과 방향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공급망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해 우리나라가 어려운 국제 환경에서 살아남고, 나아가 그간의 번영을 이어갈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전체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그러한 작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우리나라가 기여해야 한다. 이러한 기여는 우리나라가 현재 내세우고 있는 외교 정책의 기본 목표인 글로벌 중추국가 달성과도 궤를 같이 한다. 공급망 재편 관련 문제를 글로벌 중추국가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외교 과제의 핵심 중하나로 파악하고 접근해야 한다.

지구 살리는 선박 운항 비법은 해양 동물에 있다

이상준 포스텍 교수 연구팀

국내 연구진이 수중 마찰 저항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연비를 향상시키는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최근 포스텍 기계공학과 이상준 교수·통합과정 김해녘 씨 연구팀은 해양 동물의 점액층의 구조와 기능에서 영감을 받아 해수와의 마찰을 줄이고, 장기간 저마찰 성능을 유지할 수 있는 표면 기술을 개발했다. 이번 연구는 코팅 과학 분야에서 국제 학술지인 『어플라이드 서피스 사이언스(Applied Surface Science)』에 게재됐다.

바다에 서식하는 많은 해양 동물의 표면은 미끌미끌한 점액질로 덮여 있다. 해양 동물들의 점액은 외부로부터 자신들의 피부를 보호하거나 바닷물과의 마찰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점액의 효율적인 분비와 저장 시스템 덕분에 해양 동물들은 거친 바다 환경에서도 특유의 점액층을 잘유지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를 자연 모사한 것이다.

해양 동물들의 점액은 직경이 수 마이크로미터이고 입구가 좁은 구멍 형태의 점액샘에서 생산되고 분비된다. 연구팀은 이 점액샘의 구조에 착안해 이번 연구를 설계했다. 먼저 폴리스티렌을 클로로

왼쪽부터 이상준 포스텍 교수와 통합과정 김해녘 씨이다.

사진=포스텍

포름에 용해시킨 다음 알루미늄 기판 위에 도포시키고 주변 수증기를 용액 표면에 물방울 형태로 응축시킨 후 곧바로 물방울을 증발시켰다.

그 결과, 물방울이 증발된 자리에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미세한 물방울 모양의 구멍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다공성 표면이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연구팀은 캐비티에 윤활유를 채워 넣음으로써 해양 동물의 피부와 유사한 미끌미끌한 저마찰 표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의 코팅 기술로 제작된 표면은 실제 대형 선박의 운항 속도에 해당하는 초당 약 12미터 조건에서 매끈한 알루미늄 표면에 비해 마찰력을 최대 39%까지 감소시켰다. 이는 비슷한 고속 유동 조건에서 얻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저마찰 성능이다.

선박은 추진력의 약 60%를 해수와의 마찰로 잃는다. 또한, 연간 세계 석유 소비량의 약 6.3%,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약 3.4%를 차지하고 있어 선박의 마찰 저항을 저감시키는 기술은 환경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연구를 이끈 이상준 교수는 “이번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대형 선박 한 척당 최대 연간 40∼50억 원의 유류비를 절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육상 운송체나 유류 수송 파이프 등 다양한 분야의 에너지 비용 절감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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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양우산처럼 교수와 학생을 챙겨주는 대학 정책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양우산(陽雨傘)’이 인기를 끌고 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반복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양산과 우산 겸용이라 필요에 따라 바꿔 쓸 수 있는 양우산은 국지성 호우가 잦은 장마철에 특히 쓸모가 있다. 접으면 크기가 작고 휴대하기 쉽다는 점도 소비자들이 양우산을 찾는 이유다.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 비를 막아주고, 햇볕이 따가우면 양산이 되어 자외선을 막아준다. 비를 피하고 싶은 사람이나 햇볕을 피하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만족감을 주는 것이 바로 양우산이다.

양우산처럼 학생과 교수를 모두 만족시키는 대학 정책을 마련할 수는 없을까? 그동안의 대학 정책은 교수의 처우나 자존감은 도외시한 채 지나칠 정도로 학생 중심으로 진행돼왔다. 학생 중심의 대학 정책이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다. 신도가 없는 교회에는 구제할 영혼도 없듯이 학생이 없는 대학에 전수할 교육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대학 정책이 과도할 정도로 학생 중심으로 치우치는 과정에서 교수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낄 만큼 고려 대상에서 밀려나버렸다. 학생 중심 정책을 실행

하느라 교수의 업무량은 늘었지만, 교수에 대한 혜택에 대한 고려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에서 어떤 정책이나 제도를 새로 도입하면 교수는 힘들고 학생만 좋은 프로그램인 경우가 많다. 교수들이 대학을 “학생 천국 교수 지옥”이라 부르는 것은 대학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양산과 우산의 기능을 합친 양우산처럼, 교수도 좋고 학생도 좋은 대학 정책을 실행할 방안은 없을까? 교수에게는 혜택을 제공하면 안 되는 것일까? 학생은 물론이거니와 교수에게도 좋은 대학 정책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양우산 대학 정책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학생 중심의 교육 전략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교수의 노력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교수에게 보상을 제공하면 자신에게 맡겨진 교육 프로그램을 마지못해 관리하는 대신 더 능동적으로 ‘가동’할 것이다. 예컨대, 급여 인상을 비롯해 추가 연구비 지급이나 승진 같은 혜택이 뒷받침된다면 교수는 학생 중심 정책을 더욱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학생에게 돌아가는 교육의 질도 결국 높아질 것이다. 교수의 수고를 인정하고 보상 기준을 마련하는 문제를 그래서 고민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수가 새로운 교육 전략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 필요한 행정 업무를 대폭 줄여야 한다. 지금은 10년 전에 비해 교수의 행정 업무가 두 배이상 늘었다. 불필요한 형식적인 서류도 많다. 학생

을 위한 교육 자료를 만들고 편집하고 배포하는 과정을 간소화하면 교수의 행정 업무 부담을 대폭 줄일 수 있다. 교육 자료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한다면 행정 업무도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교수의 직업 만족도가 더 높아진다면 교수도 학생을 만날 때마다 더 밝은 표정을 짓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학생 중심의 교육 전략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교수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교수는 타율적으로 일하는 것을 싫어한다. 학생 중심의 교육 과정에서도 교수에게 충분한 자율성을 부여해야 하는 이유다. 자율성을 보장해 줄수록 교수는 자신의 경험과 전문성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며, 자신의 업무 스타일에 알맞게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할 것이다.

교수도 사람이다. 언제까지나 교수의 노력과 희생만으로 학생 중심 교육을 끌어갈 수는 없다. 교수에게 혜택을 제공하면, 교수는 학생에게 교육적 혜택을 더 많이 제공할 것이다. 더불어 교수 자신의 직업 만족도도 높아진다. 학생에게는 최상의 교육을 제공하고, 교수에게는 직업 만족도를 높이는 양우산 같은 대학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양우산과 같은 교육 정책은 비나 햇볕처럼 예측할 수 없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지되는 지속가능성을 지향해야 한다. 학생과 교수 모두가 기쁘게 참여하는 정책이라야만 지속가능하다. 대학 정책 관계자들이 양우산의 쓸모를 이모저모 살펴 보기 바란다.

제공=스페이스K 서울

갤러리 초대석

「깊은 꿈에 빠지다」

제이디 차, 2023, 캔버스에 유채, 360X200cm(Diptych).

런던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캐나다인 작가 제이디 차(Zadie Xa)의 개인전이 한국에서 열린다. 제이디 차는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혼종의 정체성과 타자성을 탐구한다. 마고 할미, 바리공주 등 여성이 주도하는 한국 전통 샤머니즘을 다룬 이야기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회화와 조각, 설치 등의 매체로 재탄생한다.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뉜 전시장에서는 전통 설화의 캐릭터들과 상상 속 동물들이 서로 다른 차원을 구성하며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면에 등장하는 구미호는 우리 주변에 부정당하거나 천대받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기회를 준다.

「구미호 혹은 우리를 호리는 것들 이야기(Nine Tailed Tall Tales: Trickster, Mongrel, Beast)」에서는 한국 문화와 설화에서 영감받은 작가의 작품 30여 점을 소개한다. 전시는 문화예술 나눔공간 스페이스K 서울에서 오는 10월 12일까지다.

조준태 기자 aim@kyosu.net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민연’에는 고양이가 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하 민연)에는 고양이가 있다. 그 고양이가 자랑이다. 민연에는 냥인도 있고, 낭인(浪人)도 있다. 이것이 자랑거리가 될 거라고 결코 생각지 못했다.

각자의 세계에서 따로 놀던, 부평초 같은 냥-낭인들은 민연에서 만나 협업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전공·나이·성격·취향 무엇 하나 같은 게 없다. 그런데 재밌고 그래서 서로 배울 것이 많다. 신나는 학문 현장이다.

그러나 공부나 연구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민연은 우리에게 삶터인 동시에 쉼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0여 년을 비흡연자로 살던 내가 민연에 와서 골초가 됐다. 불혹(不惑)을 목전에 두고 논문 쓰기에 끙끙 앓다가 폴폴폴 뿜어보는 줄담배의 참맛을 배운 것이다. 고운 말씨는 구수한 조롱에 능해졌고, 외로운 몸은 독일제 반려 가전의 황홀함도 알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혹시라도 마주칠까, 고양이에게 지녔던 막연한 공포증은 민연 한편에 길냥이 밥 차리는 기쁨으로 대신 채워졌다. 민연에는 고양이가 있다. 퉁퉁한 체구에 한쪽 눈을 잃은 턱시도 냥이는 ‘까치’가 되었다. 작고 여리게 생겼지만 배짱만큼은 어느 고양이보다 두둑한 치즈냥이는 ‘라떼’라고 부르기로 했다. 까맣고 하얀, 노랗고 붉은 털뭉치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러나 생김으로 붙인 이름이 까치와 라떼 자체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까치는 어디선가 싸우다 다쳐 애꾸눈인 상태로 민연 마당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긴 것은 카리스마가 넘쳤으나 알고 보니 쫄보다.

라떼는 똥꼬발랄한 새끼냥으로 처음 만났다. 그

러나 이 깜찍한 얼굴로 멀리까지 하악질을 해대며 이 구역을 평정해버리고는 까칠한 대장냥이가 됐다. 다른 생김, 다른 성격의 까치와 라떼는 공통적인 속성도 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사료와 깨끗한 물을 찾아 민연 마당을 오가지만 결코 쉽게 곁을 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민연에는 아직 존재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혹은 먼 데서 보았으나 아직 이름 없는 고양이들이 숱하다.

민연의 냥-낭인들은 길고양이와 비슷한 습성을 지녔다. 고된 풍찬노숙, 정처 없이 떠도는 야인의 삶,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로 보따리장수라는 별칭답게 전국 방방곡곡 영역을 넓혀 시간 강의를 뛰며 사는 방식이 그러하다. 배불리 밥 먹을 수 있고, 얼큰하게 술 마실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반겨 움직인다. 다행히 민연이라는 교차 지점에서 만난 우리는 배부르고 등 따습게 공동의 연구 막노동을 수행하게 됐다. 시일이 정해져 있어 더욱 간절하고 정답다.

냥-낭인들은 학문후속세대라 불린다. 학문에 감히 기성이라는 것이 있는지, 비전임과 전임을 나누어 신진과 기성을 구분하는 그 명명법이 무척이나 애매하고 우습다. ‘학문후속세대’는 완곡어인가 멸칭인가? 그러나 ‘학문후속세대’의 연구는 기성의 연구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집고양이와 길고양이가 세상에서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살지만,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집고양이가 모든 측면에서 길고양이보다 좋은 것만이 아니고, 길고양이도 그들 사는 방식에 대한 ‘가오’가 있다. 그리고 동가식서가숙하는 비전임-

신진-학문후속세대에게도 ‘늬 집엔 이거 없지?’하는 ‘가오’가 있다. 이것이 정신 승리로 여겨질지라도 상관없다.

‘학문후속세대’라는 이름에 걸린 기대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지 않으나, 그러한 기대나 예측 바깥에서 자유롭게 놀고 싶다. 냥님들도 그 행동이 언제나 예측불가하고 돌발적이기에 더욱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겠는가. 돌발과 엉뚱은 학문후속세대만이 누릴 수 있는 재미고 냥-낭인만의 ‘가오’다.

공자님을 좋아하진 않지만, 어쨌든 공자님도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온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공부, 친구, 즐거움이 함께다. 무려 『논어』의 첫 구절이다.

물론 군자가 아닌 나는 성질을 참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같이 성질부려주고 울분 토하며, 끝내주게 놀고 함께 공부하는 나의 ‘위로들’이 있다. 이것이 나의 자랑이 될 거라고 전날에는 결코 생각지 못했지만, 이제는 쩌렁쩌

렁 외쳐 우쭐거리고 싶다. 민연에는 고양이가 있다. 그리고 냥-낭인도 언제나 같이 있다!

최빛나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한국과 베트남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옛 문학과 문화를 비교하는 작업에 흥미를 두고 있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한·월 관음보살의 형상 비교 연구: 설화와 도상을 중심으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민의 문화등반 60<끝>

꿈이 없는 청년을 걱정하는 중년에게

청년이 꿈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는 한참 되었다. 앞으로 뭐가 하고 싶냐는 질문에 청년은 어두운 표정과 침묵으로 일관한다. ‘요즘 애들은 꿈이 없어~’ 대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는 물론이고 초중고 선생마저 걱정이 한가득이다.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청년이 꿈이 없다니, 느낌상 매우 부정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과거의 청년은 무슨 구체적인 꿈이 있었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심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문화심리학자’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고 있는 필자는 취업이 잘 될 거라는 친척 형님의 추천으로 심리학과에 진학했다. 아내를 일어일문학으로 이끈 것은 장모님께서 지인에게 할부로 구입한 일본어 학습 전집이었다.

오랜 시간 학생의 전공을 결정지은 것은 소위 고3 때 치렀던 학력고사 또는 수능 모의고사의 점수였지 결코 학생의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도 딱히 어떤 꿈이나 목표가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렵게 대학에 왔다는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뿐 졸업하고 나서 뭘 해야겠다는 계획이 있는 친구는 드물었다.

졸업이 가까워지면 토익을 보네, 학점 관리를 하네 하며 나름 취업 준비를 했지만 그것이 어떤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덜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지금 청년들’이 꿈이 없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고, 여러 사람들이 그걸 걱정하기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나때는 안 그랬지만 지금 청년들은 뚜렷한 인생 목표와 계획을 갖고 세상에 나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나는 한참을 살아오면서 갖게 된 여러 가지 목표를 예전부터 꿈꾸어왔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심리학적으로는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중년이 되면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가장 큰 이유는 물리적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멈출 용기도,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에너지도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지나온 삶을 긍정하며 삶의 안정감을 찾는다.

그러나 돌아보면 인생은 언제나 한 치 앞

을 알 수 없었다. 고등학생 때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필자는 부모님께 물려받은 색약 때문에 천문학의 길을 갈 수 없었고, 사학과를 갈까 했으나 취업이 어렵다는 주변의 걱정 때문에 심리학을 선택했다. 졸업이 다가오면서 공부에 대한 막연한 동경 반과 취업에 대한 공포 반으로 대학원에 진학했고, 박사학위를 받고 난 다음부터는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고뇌와 방황이 이어졌다.

일찌감치 보다 뚜렷한 꿈이 있었더라면 그러한 고뇌와 방황의 시간이 없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잘 짜여진 계획도 인생의 무수한 변수 앞에서는 제대로 맞아들어가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그때그때 되는 대로 살아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운칠기삼(運七氣三)이란 말이 있듯이, 아무리 운이 좋아도 자신이 할 것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이 순간, 현재는 우리가 경험한 그 어느 시대보다도 불확실성이 큰 시대다. 경제구조의 변화, 기후 및 환경재난, 닫혀 가는 신분 이동의 가능성. 지금 시대의 청년들이 꿈을 갖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혼과 출산율이 괜히 바닥을 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기성세대가 후속세대에게 전달해야 할 것은 회의와 절망이 아니라 할 수 있다는 희망이어야 한다. 꿈이 없어도 잘 살수 있다. 당장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 한때 설정한 목표가 꺾이거나 사라져도 잘 살 수 있다. 하루하루 의미있게 자신의 삶을 살면 된다. 이런 말을 해주는 어른도 한두 명은 필요하지 않을까. 불확실성의 시대에 근거 없는 희망을 주자는 말이 아니다. 살아갈, 살아낼 용기를 주는 것은 근거 없는 장밋빛 미래를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우리는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세상을 만든 책임이 있고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줄 책임도 있다.

이번 호로 ‘한민의 문화등반’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수고해 주신 필자와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한민 문화심리학자

문화라는 산을 오르는 등반가. 문화와 마음에 관한 모든 주제를 읽고 쓴다. 고려대에서 사회및문화심리학 박사를 했다. 우송대 교양교육원 교수를 지냈다.

김상돈의 교수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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