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기울어진 운동장, ‘학생 충원율’로 따질 상황 아니다

데이터로 읽는 대학⑦

미충원율 지표의 적절성

대학정원의 미충원과 관련된 두 번째 내용은 ‘대학 미충원율 지표의 활용이 적절한가’이다. 정부의 각종 재정지원사업에 활용되는 신입생(재학생) 미충원율 지표가 과연 적절한가에 대한 분석이다.

최근까지 실시된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도 충원율은 부실대학 퇴출 여부를 평가하는 주요 지표 중 하나로 비중이 강화됐다. 대학 입학자원 급감 등으로 인한 신입생 충원율과 더불어 재학생 충원율의 중요도가 더 높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입생·재학생 충원율 가중치는 더 높아져

교육부가 정원감축을 목표로 발표한 ‘2022~2024년 대학·전문대학 혁신지원사업기본계획 시안’ 및 ‘2023학년도 재정지원제한대학 지정방안’을 살펴보자. 선정된 257개 일반대·전문대는 ‘자율혁신계획’에 따라 2023∼2025년 기간에 △적정규모화 계획(정원내 모집뿐 아니라 정원외 모집 합한 총량개념) △특성화 전략 △거버넌스 혁신전략 △재정투자 계획 등을 제출했다.

올해 미충원 규모보다 더 도전적인 감축 계획을 수립한 대학에는 최대 60억 원 지원금 지급, 올해 미충원분 이내의 감축계획을 세운 대학에게도 400억 원의 별도 재정 지원계획이 마련됐다. 정원감축 인센티브로 일반대학 1천억 원과

전문대학 400억 원의 사업비가 배정되어 있다. 그러나 적정규모화를 이행하지 않는 대학은 일반재정지원을 중단한다. 결국 정부의 지원은 정원 감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지금까지 정부의 각종 재정지원사업에 활용되는 평가지표 가운데 특히 학생충원율을 주요 지표로 활용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국립대보다는 사립대가 불리하고, 사립대 중에서도 지역, 특히 중소도시에 소재한 사립대가 수도권 집중화 현상 등으로 불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른 정량지표는 법인과 대학본부에서 노력하면 지표를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자원의 확보는 수도권 지향성과 상위 대학·학과를 위한 개인적 욕구와 사회적 인정 요구와 관련한 문제이므로 대학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지표가 아니다.

충원율, 개별대학 성과지표 아니다

2014년에 발표된 구조개혁 추진계획에서 교육부는 향후 대학소재 지역별 충원율을 전망했다. 대학소재 지역별 충원율이 낮아질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이를 구조개혁이나 재정지원 등의 평가지표로 사용하는 우(愚)를 범했다. 충원율 문제를 개별 대학의 성과지표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지표로 취업률이 있지만 이 또한 수도권에 양질의 일자리와 산업체 등이 몰려 있기 때문에 정주 여건이 갖춰지지 않

2013년 이후 대학 소재지역별 충원율 전망

2013년 2018년 2023년 2025년 2030년 2035년 2040년

수도권

제주권

동남권

호남권

대경권

충청권

강원권

160%

140%

120%

100%

80%

60%

40%

20%

※ 출처 : 배상훈 외(2012), 미래 고등교육 수요 변화 분석 및 대응방안 연구

는 지역대학에게는 상대적으로 불리한 지표다.

그러므로 획일적이고 편향된 평가지표를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2014년에 실시된 대학구조개혁 평가지표를 보면, 정량지표 6개 중 학생충원율 지표(배점 8점)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하지만 대학의 노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지표로 삼는 것은 학령인구 급감과 지역소멸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대학을 더 어렵게 만든다.

‘2023학년도 정부 재정지원 제한대학’도 교육 여건 지표 2개와 교육성과 지표 3개, 법인 책무성 지표 1개 등 총 6개 지표로 선정했는데, 교육성과 지표 3개 중 2개가 신입생과 재학생 충원율이다. 재정지원제한대학에 선정되면 대학이 정

부 재정지원사업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이들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도 불이익을 받는다. 국가장학금 Ⅰ유형에 포함된 대학의 학생들은 국가장학금 Ⅱ유형을 받지 못하고, 정부 지원 학자금대출도 50%까지만 가능하다. 국가장학금 Ⅱ유형 대학의 학생은 국가장학금 Ⅰ·Ⅱ유형과 학자금 대출이 모두 차단된다. 왜, 학생들까지 피해를 봐야 하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다.

지역소멸 위기에 충원율로 선제적 대응?

2023년 3월에 교육부가 발표한 ‘2023년 대학·전문대학 혁신지원사업 기본계획’에 따르면, 중점 추진방향에서 ‘학생 미충원으로 어려움에 처

한 지방대학이 역량을 강화하여 지역혁신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재정지원 확대’라고 제시되어 있다. 학생 미충원으로 어려운 지방대학에 대해 재학생 충원율을 근거로 포뮬러 사업비를 배정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한, ‘기관평가인증’과 ‘경영위기대학 지정방안’을 시행할 때도 경영위기대학 지정시에 수도권과 비수도권 편차가 큰 ‘신입생 미충원율’을 핵심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버린 충원율을 정부가 평가지표로 활용하면서 지역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대학을 위한 선제적 대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자 왜곡이다. 그러나 지역대학이 지역소멸을 지체시킬 매우 중요한 존재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정원문제는 정부의 평가가 아닌, 지역대학이 자율적으로 입학정원을 조절하도록 해야 한다. 경영위기대학은 퇴로를 열어주고, 초중등학교보다도 못한 교원 1

인당 학생수를 이 기회에 OECD 주요 국가 수준으로 높일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황인성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사무처장

대학평가와 고등교육 전문가로 교육통계 분석 작업에 참여해 왔다.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을 거쳐 한국대학교육협의회 대학정보 공시센터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지냈다.

「디지털 불법 복제 인식 전환과 저작권 교육 강화 방안」토론회

2023. 6. 19. (월) 오전 10시

국회 의원회관 제1소회의실

“글로컬대학 지원 사업, 지방대 구조조정 정책에 불과”

전국대학노조, 교육부 앞 농성 돌입

전국대학노조가 ‘글로컬대학 사업은 현재의 수도권 대학을 유지하면서 비수도권은 소수 대학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대규모 구조조정 정책’이라며 정책 방향 전환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지난 7일부터 교육부 앞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2030년대 중반이면 학령인구가 30만 명대 초반으로 감소한다. 수도권 입학정원이 약 20만 명이고 일정 규모 이상의 비수도권 지역 주요 국·사립대 30개 대학의 입학정원이 약 10만 명에 이른다.

대학노조는 “수도권 정원은 유지·증원하면서 지방대는 30개 대학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정부 의도가 명확하다”며 “글로컬대학에 선정되지 못한 대다수 대학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첨단분야 인재 양성을 이유로 교육부가 오히려 수도권 정원은 늘리는 등 지역균형

발전에 역행하는 모순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대학노조는 지역균형발전과 대학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책 쇄신을 요구했다. 전체 대학에 대한 균형지원과 일반재정지원 예산을 늘리고 인건비 등 대학운영비에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예산 범위 확대를 촉구했다. 이와 함께 전체 대학의 규모와 역할, 기능 조정에 대한 국가 차원의 중·단기 대학개혁의 기본계획부터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팬데믹 조약’에서 항균제 내성 빠지나

코로나19 환자, 세균 감염으로 다수 사망

최근 연구분석 전문 미디어인 <더 컨버세이션>은 「세계보건기구의 ’팬데믹 조약‘에서 항균제 내성을 빼면 인류는 미래의 팬데믹에 극도로 취약해 질 것」이라는 제목의 소식을 전했다.

현대사회에서 항균제·항생제 남용으로 인해 약물 저항성을 지닌 세균이 늘어났다. 더 많은 항균제는 더 많은 저항성 세균을 낳고, 이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또 다른 차원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슈퍼박테리아의 등장이 그런 예이다.

지난달 말 세계보건총회에서 ’팬데믹 조약‘이라는 팬데믹 문서 초안이 회원국에 공유됐다. 그런데 이 문서에서 항균제 내성을 해결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언급이 제거될 위험에 처했다.

팬데믹 조약은 2021년 12월 세계보건총회에서 미래에 발생할 팬데믹을 국제협력 차원에서 해결하자는 논의에서 시작됐다. 코로나19는 바이러스로 인해 발생했지만, 미래의 팬데믹이 페스트나 콜레라와 같은 세균성 질병으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다. 지금도 세균 감염만으로 전 세

계적으로 8명 중 1명이 사망하고 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의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19 사망자 중 다수가 항균제로 치료해야 하는 2차 세균 감염인 폐렴과 관련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팬데믹이 바이러스에 의한 대유행이라고 하더라도, 항균제 내성 문제는 국제협력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조항이 팬데믹 조약에서 빠질 우려가 있다고 <더 컨버세이션>은 분석했다. “안전한 물과 위생과 위생 시설에 대한 더 나은 접근성”, “더 높은 수준의 감염 예방·통제”, “인간·동물·환경의 전염병 위협에 대한 통합 감시: 항균제 사용 방법을 최적화하고 항균제 내성을 방지하기 위한 항균제 관리 노력의 강화”

그동안 시민사회와 학계 전문가 등이 항균제 내성을 팬데믹 조약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왔다. 하지만 팬데믹 조약이 바이러스 위협에만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국제사회가 항균제의 보전·개발·공정한 분배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시된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비수도권 사립대 81.3%가 적자… 중규모 대학 더 심각

대교협, ‘대학 등록금 및 사립대 운영손익 현황 분석’

지난 15년간 등록금 동결로 대학의 실질등록금은 20% 감소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는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대학 등록금 및 사립대학교 운영손익 현황 분석’을 7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학생 1인당 연평균 등록금은 국‧공립대 420.3만원, 사립대 756.9만원으로, 각각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2011년 대비 실질등록금이 20.8%, 19.8% 낮아진 수준이다.

대학등록금은 2009년부터 15년째 동결됐다. 지금 대학은 등록금 법정 한도 내에서 등록금을 인상할 수 있다. 2023학년도 등록금 인상 법정 한도는 4.05%이다. 등록금을 법정 한도보다 인상한 대학은 3천800억 원에 달하는 국가장학금Ⅱ 유형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실질 운영수익 대비 등록금 수입 의존율은 2011년 대비 2021년 70% 이상으로 나타났으며, 인건비와 관리운영비 같은 경상 경비 비율은 9.2%p 증가했다. 실질 운영수익 대비 경상 경비 비율이 70% 이상인 대학 수가 2011년 62개교에서 2021년 138개로 76개교가 증가했다. 경상성 경비 비율이 90% 이상인 대학은 2021년 기준 13개로 소규모 대학에서 많이 나타났다.

대학의 재정 상황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됐다. 2011년에는 수도권 사립대 평균 운영이익은 84억

2021년 사립대 규모별 운영수지 적자 대학 현황

「사립학교법 시행령」 개정내용

자료 : 대학정보공시(23.05.04)

수도권

비수도권

재학생수 1만명 이상 재학생수 5천명 이상

1만명 미만

재학생수 5천명 미만

전체 대규모 중규모 소규모

70.8%

81.3%

54.5%

64.7%

85.0%

87.9%

73.9%

82.9%

원, 비수도권 사립대는 33억 4천 만원에 달했지만, 2021년 기준 수도권 사립대는 2억 4천 만원, 비수도권 대학은 15억 4천 만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비수도권 대학의 경우 2014년부터 지속적으로 운영수지 적자 규모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운영수지 적자를 나타낸 대학을 살펴보면, 2011년 대비 2021년 수도권 대학 중 적자 대학의 비중은 47.7%p, 비수도권 대학은 48.0%p가 증가했다. 2021년 기준, 수도권 대학 70.8%, 비수도권 대학 81.3%가 적자였다. 특히, 중규모 대학에서 적자 대학의 비중이 크게 증가해 2021년 기준, 수도권 대학은 85.0%, 비수도권 대학은 87.9%가 적자였다.

대교협 관계자는 “장기간의 대학등록금 인하·동결에 따른 사립대학의 열악한 재정 여건 개선을 위한 대학 수익 다각화 및 정부 차원의 지원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고등교육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대학 재정 확충뿐만 아니라, 대학의 재정자립 능력향상과 이를 위한 자율성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 2월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는 “대학 간, 계열 간 등록금 격차가 크고 다양한 상황에서 고등교육법에 보장된 직전 3년간 물가인상률의 1.5배 까지 인상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며 “등록금 인상 시 적용되는 국가장학유형Ⅱ와의 연계를 폐지해야 한다”라고 밝힌바 있다. 신다인 기자 shin@kyosu.net

‘유휴 교육용 재산’ 처분 근거 마련

교육부, ‘사립학교법 시행령’ 일부개정

열악해진 사립대의 재정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대학 이전, 통·폐합 등으로 용도폐지 돼 처분할 수 있는 재산유형에 대한 제한이 사라진다. 교육부 장관이 정하는 범위 내에서 학교 교육에 지장을 주지 않는 ‘유휴 교육용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된다.

교육부는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사립학교법 시행령’과 ‘교육공무원 승진규정’ 개정령안이 심의·의결됐다고 밝혔다. 사립학교의 기본재산 처분 시 관할청의 허가 대신 신고로 처리할 수 있는 대학유형(대학, 전문대학 등)별 구분을 없애고, 금액을 현실화하는 등 신고 대상과 범위 등을 확대했다. 재산 처분 신고 범위는 확대했다.

‘교육공무원 승진규정’도 개정해 금품비위나 성범죄 등에 대한 조사나 수사로 직위해제 처분을 받은 교육공무원의 징계처분이 무효·취소되거나 형사사건이 무죄로 확정된 경우, 해당 직위해제 기간을 경

「사립학교법 시행령」개정내용

자료=교육부

력 기간으로 인정해주는 근거도 마련된다. 또한, 교사에 대한 다면평가 시 평가자 수를 종전에는 일괄해 3명 이상으로 하던 것을 평가대상자 수에 따라 달리 정하도록 했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은 “이번 개정을 통해 교육공무원의 경력 기간 산정이 보다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사립대학(법인)의 재정 여건이 나아지길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강일구 기자 onenine@kyosu.net

“AI 디지털 교과서 맞춤 교육 실현할 것”

▶1면에서 이어짐

교육부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을 반영한 양질의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가 개발될 수 있도록 교과서 발행사와 에듀테크 기업이 협업하도록 했다. 심사에 합격한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는 6개월간 안정성, 신뢰성, 적합성을 검토한 후에 현장에 보급할 예정이다. 성공적인 현장 안착을 위해 수학, 영어, 정보, 국어(특수교육) 과목의 교사 연수, 맞춤형 교수·학습방법 개발 등도 함께 추진한다.

한편, 학생들이 디지털교과서를 건강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발행사와 에듀테크 기업은 개발 시유해 콘텐츠 차단 등 윤리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학교는 2022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디지털 소양 교육을 포함해 정보 평가, 정보통신윤리, 과몰입 예방 등 디지털 문해력 향상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원활한 현장 안착을 통해 사용자 의견수렴 절차를 별도로 마련해 현장의 요구를 충분히 수렴해 설계에 반영할 예정이다.

강일구 기자 onenine@kyosu.net

삐딱한 시선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 박사하기』를 읽고

요즘 부쩍 냉장고 전구가 생각난다. 유학을 준비하던 2000년대 초, 모교 출신의 시간강사 선생님은 학문의 어려움을 그 불빛에 빗댔다. 방학 때면 수업이 없으니, 강의료가 없었다. 냉장고에는 식품이 채워지지 못했고, 결국에는 안쪽의 환한 전구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명암이 현현(顯現)하는 순간이었다. 빛을 좇지만, 현실은 텅 빈 냉장고였던 것이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강사법이 만들어졌다. 시간강사 처우 개선의 목소리는 줄곧 있었지만, 시간강사의 연이은 자살 이후에야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정부와 국회가 움직였고, 2011년에 강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 개정만큼이나 이행도 어려웠다. 온갖 핑계로 미뤄져 2019년에서야 법이 시행됐다. 대비할 수 있었던 학령인구 감소 위기와 예측할 수 없었던 코로나19 도래 직전이었다.

지난 겨울 『한국에서 박사하기』가 화제였다. 필자들은 자살이나 천막농성을 하진 않았다.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던 인문·사회 대학원의 이야기를 당사자의 목소리로 발화했다. 하소연이나 분노를 쏟아내지 않았다. 부조리한 현실을 차분히 논하며 학계의 문제까지 풀어냈다. 종종 행간에서 격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학계 내부인이라면 누구나 동조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말 하나하나가 마음을 파고들었다.

필자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연구자들이 맨날 하는 이야기 아닌가. 사실 한국이나 외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자들은 늘 불만이 가득하지 않던가. 시나브로 냉랭해졌다. 책은 관습적인 설명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시선과 경험으로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당사자성을 지닐 뿐 새롭지 않았다.

그동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교육부의 수많은 사업이 관료들만의 혜안과 선의에서 나왔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빛바랜 강사법처럼 또 다른 병폐가 생겼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필자들은 오랫동안 벼려진 의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담론과 도구를 만들자고 주장한다. 책에서 지적하듯, “무엇을 목표로 문제를 풀지 이야기할 수 있는 담론과 도구는 거의 구축”(134쪽) 되어 있지 않으며, 의제를 이끌어 가는 사

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솔직히 비관적이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엄혹하다. 중앙과 지방 간 대학원의 격차가 너무 커졌다. 해결을 위한 것인지, 해체를 위한 것인지 모를 교육부 사업이 줄줄이 있다. 교육부는 글로컬대학30 사업을 추진하면서, 몇 달 안에 5쪽짜리 혁신안을 제출하라고 했다. 지난 3월에는 인문사회 융합인재 양성사업을 공고하고 두 달 만에 대학 컨소시엄 계획을 제출하라고 했다. 참여는 자유지만 사활을 걸고 뛰어든 대학이 적지 않다.

이뿐인가, 경쟁을 붙이는 사업이 즐비하다. 교육부 사업의 방향이 맞는가는 차치하고 촉급하기 그지없다. 많은 연구자는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도 여력도 없다. 대학원과 학계는 국가의 지원으로 가파른 양적 성장을 이뤘지만, 학술 연구 기반은 국가의 지원에 종속되어 버렸다.

새로운 담론과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사이 많은 곳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미 BK와 HK 사업 등을 통해 대학원의 상대적 ‘부익부 빈익빈’이 가속화됐다. ‘부자’와 ‘빈자’가 같은 학계 안에 있을 뿐 멀리 떨어져 존재한다. 강한 변화의 요구 앞에 재건축에 ‘성공’할 대학원은 많지 않다. 어떤 이에게 재건축은 남의 일일 뿐이다. 교원도 마찬가지다. 전임과 비전임, 시니어와 주니어,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립과 국립, 거점과 비거점, 모두 처한 상황이 다르다. 문제에 동조해도 공감하기 쉽지 않다.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넓은 연대를 끌어내기 녹록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박사하기』가 던진 화두는 무용한가. 그렇지 않다. 시선만 삐딱하고 가만히 있으면 누가 관심을 보이겠는가. 무관심과 무책임이 최악이다. 문제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논의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생존만을 위한 근시안적 논의에 멈춰서는 안 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부터 당장 실천해야 한다.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연구 풍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이나 학술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부조리를 거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뻔한 이야기지만 쉽지 않다. 냉장고 안에 전구는 항상 있었다. 갑자기 우리 눈에 보이게 되었을 뿐이다.

손성욱

창원대 사학과 교수

전 세계 500만 부 이상 판매된《 필링 굿》의 저자데이비드 D. 번즈의 최신작!“《필링 굿》보다 10배는 더 놀라운 책!”우울증 부문 아마존 1위최고의 인지행동치료 가이드북《필링 그레이트》는 번즈 박사의 모든 노하우가 담긴 역작이다. 이 책을 읽고 실천하는 것만으로 즉시 새로운 삶을 만날 수 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치료사들 또한 고정된 생각이 바뀌는 멋진 경험을 할 것이다.

채정호,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데이비드 D. 번즈 지음│박혜원 옮김│712쪽│값 32,000원

문예출판사

변화와 혼돈의 대전환 시대

한국 교육 변혁의 길을 찾다!

교육사상가의 삶과 사상

위대한 교육자의 삶과 교육사상을 탐색하다

우리 교육의 위기를 이해하고 미래교육의 새로운 좌표를 찾아서

더 나은 사회와 공동체적 삶을 위한 실천, 이론화에 기여한 교육사상가 11인의 삶과 철학에 대한 탐색. ‘이론적 실천가’, ‘실천적 이론가’를 지향하는 저자들은 ‘시민강좌’를 통해 활동가는 물론 우리 교육의 능동적 생산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다양한 담론을 제시한다.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지음 | 424쪽 | 23,000원

선생님, 제주 4·3이 뭐예요?

제주 4·3의 진실을 말하다

섬 전체가 상상을 초월하는 학살의 현장

왜 제주 4·3은 현재진행형인가? 1947년 3·10 민관 총파업은 왜 일어났을까? 왜 1948년 4월 3일 한라산에서 봉홧불을 올렸을까? 제주의 역사적 비극은 아름답고, 찬란하고, 당당한 비극이다. 저자는 지금, 제주공동체가 대동단결했던 그때의 역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강범 지음 | 308쪽 | 18,000원

비판 정신과 인문학으로 ‘내일’을 말하다!

레프 비고츠키

발달에 대한 과학적 문제인식을 최초로 제기한 문화심리학자 비고츠키를 전기로 만나다

르네 반 데 비어 지음 | 배희철 옮김

296쪽 | 21,000원

인격과 세계관

세계관은 어떻게 인격이 되는가?

인격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는가?

레프 비고츠키 지음 | 비고츠키연구회 옮김

376쪽 | 22,000원

왜 체게바라인가

쿠바 의료를 이끄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민중과 함께 승리한 체 게바라, 그의 길에서 ‘배려의 의료’와 ‘새로운 교육’을 만나다

송필경 지음 | 320쪽 | 19,000원

왜 지속가능한 디지털 공동체인가

불안하고 고단한 사회의 풍경, 그 속에서 우리 삶은 어떻게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

현광일 지음 | 280쪽 | 17,000원

선생님, 우리 영화로 세계시민 만나요!

세계시민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로 ‘사람, 번영, 환경, 평화, 협력’을 만나다

변지윤 외 지음 | 328쪽 | 19,000원

비고츠키 아동학과 글쓰기 교육

함께하는 글쓰기 수업을 통해 교육의 의미를 새롭게 깨우친다

한희정 지음 | 300쪽 | 18,000원

혁신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들의 필독서

*근간

선생님, 평가 어떻게 하세요? 성열관 외 지음

세계의 혁신대학을 찾아서 안문석 지음

어떻게 어린이를 사랑해야 하는가 야누시 코르차크 지음

소박한 자율의 사상가 이반 일리치 박홍규 지음

다시, 남도의 기억을 걷다 노성태 지음

미래 100년을 향한 새로운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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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재난 연구, 함께 연구할 연구자를 찾는다

천하제일연구자대회

㊶ 비판적 재난 연구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공동의 사회적 기억이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다. 선박 침몰과 압사라는 전혀 다른 유형의 재난이지만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공통점 때문에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참사를 소환했다. 세월호 참사 조사 과정을 연구했다는 이유로 나도 갑자기 전문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의 비판적 재난 연구의 척박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함께 할 연구자 동료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2015년 가을, 4·16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안전사회과 조사관이었던 나는 몇몇 과학기술학과 사회학 전공자를 모아서 연구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보고서팀을 구성할 때 몰래 품은 희망이 있었다. 여기 모인 연구자 중 누군가는 계속 세월호 참사를 연구해 내가 궁금한 것을 해명해 주지 않을까? 세월호 참사가 사회에 미친 영향, 생산된 자료 등을 생각하면 단순히 활동가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감’이 있었다.

연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연구자에게 과업을 넘기고 사회운동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항상 그랬듯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2018년 여름 선체조사위원회에서 두 안으로 나뉜 종합보고서를 발간했을 때, 본의 아니게 일하던 사회단체에서 나오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조사 실패와 갑작스러운 진로 고민이 맞물렸고, 재충전도 하고 세월호 참사 조사 과정도 정리할 겸 대학원에 진학했다. 혼란스러운 생각과 마음을 논문으로 정리하고나면 정말 세월호 참사와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별은 무슨. 2023년, 나는 ‘천하제일연구자대회’ 원고를 쓰고 있다.

재난 인식론과 재난 조사의 정치

재난은 여러 연구 주제를 파생시킨다. 재난관리체계 개선과 같은 실용적 연구부터 피해자들의 활동과 트라우마, 정부의 대응, 담론의 변화 등 재난 이후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분석까지 연구해야 할 주제는 다양하다. 나는 특히 사회가 어떻게 재난을 만들어내는지 알고 싶었다. 몇몇 개인이 아니라 사회, 즉 우리 모두가 어떤 형태로든 개입해 조직해 낸 세계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재난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는 작은 여러 선택과 결정이 어떻게 재난으로 이어지는가? 사후적으로는 충격적인 선택으로 보이는 것이 왜 당시에는 합리적인 것으

로 보였는가? 세월호 참사 직후에는 그런 질문이별로 독특하게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1~2년 사이에 발표된 논문 중 상당수가 ‘재난을 탄생시킨 사회 구조’의 문제를 다루거나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2016년 참사 2주기를 기점으로 그런 연구는 눈에 띄게 줄었다. 피해자와 특정 지역의 사회운동을 대상으로 한 몇몇 유의미한 연구가 있었지만, 아무도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과 그 결과로 탄생한 재난조사위원회를 다룰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2018년 여름, 선체조사위원회가 결론에 합의하지 못하고 내인설, 열린안이라는 두 편의 종합보고서를 내고 종료한 후, 학계에 대한 양가적인 마음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에는 논문을 쏟아내던 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하는 원망, 조사위원회가 공적 설명을 제공하지 못해 연구도 곤란에 처했겠다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누군가는 재난조사위원회라는 블랙박스를 열어야 한다. 이 제도를 탄생시킨 사회운동도 함께 시야에 넣어야 한다. 그렇게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와 선체조사위원회라는 두 개의 조사위원회, 그리고 세월호 진상규명 운동을 연구 대상으로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곧이 연구를 딛고 더 좋은 연구를 해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재난조사가 정치적·사회적 과정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사회학·과학기술학의 연구 전통과 더불어 실라 재서노프의 ‘시민 인식론(civic epistemology)’ 개념이 논문의 분석틀을 구성하는데 아이디어를 주었다. 재서노프에 따르면 “모든 사회에는 어떤 주장이 신뢰성 있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지지를 받는지에 관한 공유된 이해 방식”이 있다. 재서노프는 각국의 지배적인 시민 인식론을 분석한 국가 비교 연구를 주로 했지만, 복수의 시민 인식론 경합 연구도 가능하다. 나는 세월호 참사 조사위원회들이 겪은 혼란과 실패를 ‘재난에 관한 시민 인식론’의 경합 과정으로 이해해

보려고 했다.

그렇게 2021년 2월에 완성된 석사논문은 2014년 세월호 특별법 제정운동부터 2018년 8월 선체조사위원회 종료까지의 시기를 세 유형의 재난 인식론, 기술적 관점과 사법적 관점, 구조적 관점의 경합 과정으로 분석했다. 세월호 참사 조사에서는 특히 사법적 관점과 구조적 관점 간의 경합이 두드러졌다. 사법적 관점과 구조적 관점은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는 대체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점차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게 되었다. 구조 실패에 대한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묻는 데 계속 실패하면서 책임자 처벌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법적 과실 인정 여부를 재난의 인과 관계로 인식하는 사법주의가 강화되고, 침몰 원인 가설도 이 기준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지되었다. 개인에 대한 법적 처벌의 형태로 참사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책임의 인격화’가 세월호 참사 조사의 고유한 난점을 구성했다.

사회운동·책임·재난의 탄생

석사 논문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여러 활동가·연구자와 토론할 기회가 생겼다. 그 과정에서 후속 연구과제도 생겨나고 있다. 먼저 세월호 참사에 대응한 사회운동 내부의 차

한국의 재난 인식론 유형

구분 기술적 관점 사법적 관점 구조적 관점

인과 모델 기술적·인적 실패 인적 실패 조직적 시스템적 실패

선호되는 해결 방식 법적 처벌 기술적 개선 법적 처벌 구조적 해결

선호되는 전문성 기술적·공학적 전문성 법적 전문성 다양한 전문성(필요에 따라 구성)

담론 친화성 과학주의, 전문가주의 사법주의 안전사회

출처 :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2022) 진실의 힘, 156쪽

이에 주목한 연구가 필요하다. 석사논문에서 나는 사회운동 내부의 차이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대체로 단일한 세력으로 사회운동을 분석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대응 운동은 누군가에게는 정권 퇴진 운동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안전사회 운동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피해자 권리 운동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 부여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들은 재난의 어떤 측면에 주목했으며, 각각의 운동이 강조한 프레임과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재난과 책임 문제도 여전히 중요하다. 논문과 책에서 밝혔듯이, 여러 행위자가 얽혀있고 때로는 선의나 실수가 중요한 요인이 되는 재난의 성격과, 높은 지위에 있는 공직자들에게 큰 책임을 물으려는 대중의 요구 사이에는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딜레마가 있다. 책임의 형태를 법적 책임으로 한정할 때, 조사과정은 법정에서 유리한 증거를 찾기 위한 것으로 좁아지고 다른 질문들은 후순위가 된다. 책임에 관한 어떤 관점과 실천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이는 논문과 책의 결론에서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붙잡고 있는 고민도 있다. 노동자들의 사고는 재난의 전조이며, 산재와 재난 양쪽의 원인은 공통적이라는 문제 의식을 수용해 노동안전 연구와 재난 연구를 연결하는 것이다. 두 영역 간 이론적 기반과 연구의 맥락이 상당히 다르고 처음 생각과 다르게 교집합의 영역은 작아 보인다. 의미 있는 교집합의 영역, 연구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은 알 수가 없다.

재난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구체적 과정을 드러내는 것도 여전히 큰 욕망이다. 어떤 사회 구조, 조직의 관행이 재난을 탄생시키는가? 법적 규정과 실제 관행의 차이는 어떤 이유로, 어떻게 발생하는지, 사후적으로는 명확해 보이는 위험을 왜 당시에는 인지하기 어려웠는지, 당시에는 합리적으로 보였던 의사 결정이 어떻게 재난의 씨앗을 품게 되는지…. 큰 윤곽이 아니라 구체적인 분석을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의 자료와 관행이 공개되어야 한다. 현재는 자료의 제약이 있지만 한국에서도 그런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리라.

비판적 재난연구의 척박함

사회학자 다이앤 본은 대표작인 『챌린저호 발사 결정』(1996)의 이론화 과정을 돌아보면서 ‘챌린저호 연구를 마무리하면서 또 다른 사고를 예견했지만, 그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측하지 못했다’고 썼다. 2003년 2월 1일, 나사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폭발하면서 챌린저 연구는 본을 다시 소환했고, 그녀는 두 번째 나사 사고에 대해 상담할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비극적이게도, 나에게 또 우리에게, 다음 참사가 너무 일찍 왔다. 세월호 참사에 관한 공동의 사회적 기억이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또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선박 침몰과 압사는 전혀 다른 유형의 재난이지만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일어

났다는 공통점 때문에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참사를 소환했고, 세월호 참사 조사 과정을 연구하고 책에서 해외의 재난 사례를 조금 다뤘다는 이유 때문에 나 같은 사람마저 갑자기 전문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런 현실이 한국의 비판적 재난 연구의 척박함을 보여준다. 학문 장에서의 역할을 한정하고 연구를 시작했으나, 계속 더 역할을 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재난이라는 객체(object) 자체에 주목하고, 사회운동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아 비판적으로 분석할 연구자 동료가 절실하다. 세월호 참사 연구에서 후자를 어려워해, 결과적으로는 활동가의 스피커 역할에 머무른 연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활동가로서 내가 필요했던 것은 당신의 운동이 의미 있다는 응원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딜레마와 아포리아를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적이었다. 활동가가 논문을 찾아 읽는 것은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다. 이를 이해하고 함께 할 연구자 동료를 찾고 있다.

박상은

충북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연세대 사학과 졸업 후 약 10년을 사회운동단체 상근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등으로 일했다. 충북대 사회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에 진학해 위험과 재난을 연구하고 있다. 플랫폼C라는 사회운동단체에서도 활동한다.

저서로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이 있다. 논문으로 「통제적 규제와 외주화의 위험 전가 정치」, 「왜 세월호 참사 조사는 종결되지 못하는가?」 등이 있다. separkjul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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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차이나는 한·일 우주기술…우주로켓 꿈꾼다

유만선의 ‘공학자가 본 세상’ ㉑

2006년에 필자는 기계공학 박사과정의 끝자락에 있었는데, 때마침 단기 해외연수를 갈 기회가 주어졌다. 연수기관으로는 2001년 약 두 달 정도의 짧은 기간으로 다녀온 일본의 항공우주연구소가 떠올랐고, 당시 랩을 이끌던 분이 흔쾌히 허락해 ‘일본항공우주개발기구(JAXA, Japan Aerospace eXploration Agency)’라는 연구기관으로 6개월간 연수를 떠나게 됐다. 2006년 2월, 박사학위를 위한 실험을 끝마치느라 정신없던 연구실에서 빠져나와 하루 만에 일본의 조용한 시골마을 기차역 벤치에 커다란 여행가방을 곁에 두고 앉아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연구소에서의 생활은 낯설면서도 정말 즐거웠다. 필자를 초청해 준 랩장님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 차 없이 뚜벅이로 생활해야 했음에도 연구소에 쉽게 출퇴근할 수 있어 편했다. 같은 랩의 동료들과도 금방 친구가 되어 볼링을 치러 가거나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한 나이 많은 일본 연구자분이 술에 취해서 한국인들의 뛰어난 ‘열정’이나 ‘소통능력’이 부럽다며 이야기할 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일본연구소의 편안한 근무환경 그리고 친절하고 상냥한 동료들 속에서 즐거웠지만, 연수 기간 중에 내 마음을 무겁게 한 것도 있었다.

처음 연구소에 가서는 실험 장치를 보고 입이 벌어졌다. 당시 필자가 마음껏 실험을 해 볼 수 있었던 장치는 공기를 소리 속도의 8배 정도까지 빠르게 하여 실험용 모델을 지나가게 할 수 있는 ‘초음속 풍동(supersonic wind tunnel)’이었는데, 이러한 장치를 이용하면 로켓(rocket)이나 램젯(ramjet)과 같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비행체 안팎에서 생기는 열역학적-유체역학적 현상을 관찰해 볼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다니던 대학이나 관련 연구기관에서 이런 장치는 쉽게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연구소에서 처음 만난 초음속 풍동 장치는 이미 이곳저곳이 빨갛게 녹슬어 있었다. 이미 수십 년간 일본의 항공우주분야 연구자들에게 온갖 실험 결과를 내주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6개월 간 관련된 실험을 하면서 그곳 연구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문성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곳에서 했던 실험에 대해 6명 정도의 연구자와 기술자가 함께 지원했다. 하루에 약 4~5차례의 실험에 대해 기계장치, 통신, 데이터확보 등 각자 맡은 파트대로 척척 움직이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어

위쪽 사진은 일본 연구소에서 본 오래된 항공우주 실험장치.

아래쪽 사진은 지난달 25일 오후 6시 24분, 누리호가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되는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7번째의 자력 위성 발사국이 됐다.

사진=유만선,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느 날인가 초음속 풍동에 들어가는 공기를 압축하는 집채 만한 크기의 압축기성능이 궁금해서 현장 기술자분께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 방으로 안내해서 책장에 꽂혀있는 수십권의 노트 속에서 관련된 기록을 찾아내는 것을 보고는 학교 연구실에서 필요한 데이터만 대충 뽑아내 논문을 쓰던 필자의 모습이 생각나 부끄럽기까지 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항공우주기술 차이가 30~40년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일본에서는 오래된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실험 장치를 보면서, 또 수십 년간의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실험을 조언하고, 지지하던 전문성 넘치는 일본 연구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필자가 들은 말에 조금의 과장도 없다고 믿게 됐다.

마지막으로 두 나라의 항공우주기술 격차에 대한 생각에 쐐기를 박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일본인

동료가 구경시켜줄 곳이 있다며, 필자가 일하던 연구지역과 마주 보고 있는 차 길 건너 편의 다른 연구지역으로 안내하였다. 조금 걷다 보게 된 그곳에는 수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길이의 거대한 터널이 있었는데 분명히 실험시설의 일부로 보였다. 일본인 동료는 그곳이 일본의 대표 우주로켓인 H-II로켓의 2단 엔진을 지상에서 실험하기 위한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우주로켓의 2단 엔진은 지상이 아닌 우주공간 가까운 곳에서 연소가 되기 때문에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실험을 해야 한다. 거대한 터널 속에 로켓엔진을 놓고 점화 및 연소를 하게 되면, 마치 빨대를 입으로 세게 불 때 빨대 속의 압력이 낮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터널 속의 공기밀도가 매우 낮아지게 된다. 지상에서도 마치 우주공간과 같은 높은 곳에서의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을 빠져나오면서 일본 동료는 필자에게 한국

에도 비슷한 시설이 있는지 물었다. 순수한 질문일 수도 있었겠지만 거대한 연구비를 지원받아 이런 시설을 만들고 운영하는 나라의 연구자가 아직 우주로켓을 꿈만 꾸고 있던 한국에서 온 초라한 예비 공학자에게 던진 질문이었기에 무척 마음이 무겁고 슬펐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 누리호의 3차발사가 전남 외나로도 우주센터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탑재부에는 진짜 인공위성을 싣고서 말이다. 세계 7번째의 자력 위성 발사국이 되었다는 뿌듯함과 함께 2006년의 침울했던 내

게 이렇게 외치고 싶다.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우리도 금방 멋진 우주로켓을 갖게 될 거야!”

유만선

서울시립과학관 관장

건강한 100세 위한 치매 전문 과학자…‘K-바이오’ 꿈꾼다

여성과학기술인 이야기 ㉕ 묵인희 서울대 교수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이 시대 여성과학인 소개 캠페인 ‘She Did it’을 펼치고 있다. <교수신문>은 여성과학기술인이 본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경력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WISET과 공동으로 소개한다. 여성과학기술인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생생한 목소리가 교수 사회에 진심을 담아 전달되길 기대한다. 스물다섯 번째는 묵인희 서울대 교수다.

묵인희 서울대 교수(의과대학 생화학교실)는 건강한 100세를 연구하는 치매 전문 과학자이다. 그는 국가치매극복연구개발사업단 단장으로 치매 없는 대한민국을 꿈꾸고 있다. 고령화사회의 가장 큰 걸림돌인 치매의 원인을 찾아 그 치료제를 개발하고, 조기 진단을 위한 바이오마커 등을 연구하고 있다. 바이오마커는 단백질이나 DNA, RNA(리보핵산), 대사 물질 등을 이용해 몸 안의 변화를 알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지표다. 묵 교수는 치매의 발병기전, 조기진단·예측, 예방·치료기술 개발 등을 치매 연구의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묵 교수는 뇌 면역세포인 ‘미세아교세포’가 알츠하이머병에서 기능을 상실하는 치매의 원인을 규명하고 면역기능을 회복시켜 치료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로써 알츠하이머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는 전 세계와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디지털 대전환 시대에는 포용성을 갖춘 여성 리더십이 주목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여성 과학자들의 적극적인 회의 참여와 의견 개진, 직책 수행 의지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묵 교수는 오로지 뇌에 대한 호기심 하나로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학부를 마치고 나니 뇌가 어떻게 기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애리조나 대학원에서 치매·퇴행성질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부회장, 여성생명과학기술포럼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퇴행성신경질환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사진=WISET

능하는지 궁금해졌다”라며 “그 당시만 해도 이러한 것을 알려주시는 교수님이 없어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박사과정 때 신경과학의 기본이 되는 시냅스 형성 과정을 연구했다. 박사후연구원으로 있을 때 노년의 복병인 치매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의사 출신 아닌 의과대학 교수

서울대 의과대학에 의사 출신이 아닌 여성 생화학교실 주임교수는 묵 교수가 처음이다. “기초연구자이지만 치매라는 증상을 이해하고 원인치료제 개발에 필요한 병인기전 연구가 절실하기 때문에 늘 임상교수들과 소통하며 공동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치매 중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알츠하이머병이다. 유전적인 요인으로 발생하는 가족성 알츠하이머병은

1~5% 정도이고, 대부분은 65세 이상에서 나타나는 산발성 질환이다. 묵 교수는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병인을 찾아가는 방법도 다양해서 원인 치료제가 나온다고 해도 칵테일 요법이나 맞춤형 치료제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묵 교수는 현재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혈액에서부터 뇌를 모사할 수 있는 ‘뇌 오가노이드(Organoid; 성체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 혹은 유도만능줄기세포 등으로부터의 분화과정을 거쳐 형성된 세포 집합체)’도 만들고, 장과 뇌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장뇌축을 모사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현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것을 활용하면 환자 그룹별로 발병 원인을 파악하고 각 원인에 맞는 치료제 개발도 가능할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기초연구를 하지만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연구 패러다임의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증명해 나갔던 것이 좋은 논문으로도 이어지게 됐다.” 묵 교수는 마크로젠 여성과학자상, 과학기자협회 선정 ‘올해의 과학자상’, 로레알 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상, 한국 분자·세포생물학회 학술상, 한림원생리의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여러 논문 중 뇌 내의 면역세포 병인에 작용하는 기전을 면역대사 관점에서 규명한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에서 알츠하이머병을 포함한 퇴행성 뇌질환 분야는 연구자도 많아졌고, 연구방법론과 환자데이터 수집 및 영상분석기술 등도 세계적 수준이다. 하지만 연구자의 국제학회 네트워크가 강하지 못해 실력만큼 인정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묵 교수는 “K-컬처가 어느 날 갑자기 뜬 게 아니듯이 우리 과학자도 역량을 축적하고 있어서 조만간 바이오 분야도 세계 속에 우뚝 설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여성과학자로서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건 쉽지 않다. 묵 교수는 “이제는 여성과학자도 본인의 아이디어나 발전 방안을 스스럼없이 얘기해야 한다”라며 “남들이 어찌 생각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대화에 참여하고 직책이 주어진다면 적극적으로 맡길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이를 위해 일과 시간을 효과적으로 쓸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벽에 부딪혔을 때는 좌절하지 말고 자신을 믿고 자신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필요하다.”

선배 여성과학자로서 묵 교수는 자신의 연구 분야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그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의 적용이 본인의 연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비책이 될 수 있다”라며 “함께 해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으므로 항상 열린 마음으로 가족이나 주변 사람과 소통하면 본인도 성숙해지고 연구에도 자신감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꽃을 피우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격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4쪽

이 책은 20세기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주요 시기별로 선별해 모은 시집이다. 브레히트는 괴테, 하이네, 쉴러와 함께 독일의 4대 시인으로 거론되며, 한나 아렌트는 브레히트를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으로 평가한 바 있다.

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완벽한 방법

앤서니 맥가윈 지음 | 최이현 옮김 | 니케북스 | 464쪽

이 책은 서양 철학의 세계로 안내하는 친절한 입문서다. 복잡하고 기나긴 철학사의 여정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철학의 주요 주제를 살펴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영국의 철학박사이자 작가인 저자는 ‘옳은 행동이란 무엇인가’, ‘자유 의지는 존재하는가’ ‘실재의 궁극적 본질은 무엇인가’ 등 인류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철학적 질문들을 파고든다.

지식의 지도

바이얼릿 몰러 지음 |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428쪽

"태초에 그리스가 있었고, 그다음에 로마가 있었고, 그다음에 르네상스가 있었다." 서구 문명의 역사는 흔히 이런 식으로 서술되곤 한다. 정말 그럴까? 영국의 지성사 연구자인 저자의 이 책은 서기 500년경부터 1천500년경까지 천 년에 걸친 과학과 지식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기존의 관점과는 다른 역사 서술의 지평을 열어 보인다.

시진핑의 중국몽과 미디어 전략

정원교 지음 | 나남 | 380쪽

이 책은 시진핑 집권기에 중국몽 실현을 위해 중국공산당이 실행하는 미디어 전략의 실체와 연원을 밝힌 책이다. 베이징 특파원 출신 중국 미디어 전문가인 저자는 자신의 체험과 인터뷰, 취재 기록은 물론이고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중국 미디어와 정치의 관계를 조명한다.

자연기반해법 : 위기에서 살아남는 현명한 방법

이우균 외 4인 지음 | 지을 | 432쪽

자연은 개발 대상이자 보호 대상이라는 오래된 인식과는 달리 우리는 아주 많은 부분을 자연에 기대어 살아간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GDP의 절반 이상인 12억 개에 달하는 일자리가 자연에 의존한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투자는 기후변화에 대한 투자의 23%에 불과하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자연을 대하는 국제사회의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기원 1, 2-1, 2-2

브루스 커밍스 지음 |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1천954쪽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을 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한국전쟁은 매우 난해하고도 미묘한 성격을 안고 있다. 악을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시켜 민족사적 비극을 극대화시킨 전쟁, 이데올로기적 결전(냉전)을 가속화시킨 전쟁, 무엇보다도 개전의 책임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이었다.

별들의 흑역사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576쪽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일은 다반사다. 하지만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강한 리더십과 군사적 통찰력으로 단호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판단력을 갖춘 장군은 얼마나 될까. 흔히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고 할 만큼 지휘관의 능력은 수많은 생명은 물론 한 나라의 국운을 좌우한다. 위대한 승장과 무능한 패장의 차이는 무엇일까.

강아지풀에서 코뿔소 뿔까지

신동원 외 4인 지음 | 책과함께 | 408쪽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떤 병을 앓았고,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들은 몸과 병을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하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현존 유일의 고려 의서인 『향약구급방』은 의료 자원이 부족한 향촌에 사는 사람들이 긴급한 상황에 약물과 치료법을 편람식으로 담은 의료 지침서다.

원시별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412쪽

항일 독립운동가 주세죽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 『코레예바의 눈물』로 이태준문학상을 수상한 저자가 신작인 이 책으로 돌아왔다. 작가는 2001년 첫 장편소설 『아름다운 집』 이후 끊임없이 역사의 아픔과 시대의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해 왔다. 특히 분단과 이데올로기에 뒤엉킨 삶들을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 특유의 사실적이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그려냈다.

저자가 말하다_『두 번째 베트남 전쟁』 윤충로 지음 | 푸른역사 | 300쪽

‘잊힌 학살’, 기억의 전쟁으로 재현되다

올해 2월 7일,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 응우옌티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법원은 한국군의 학살을 사실로 보고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1968년 2월 사건이 있은 지 55년, 1999년 한국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하 베트남 운동)이 시작된 지 24년여 만의 일이었다.

한국 정부는 3월 9일 항소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 정부는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존중해달라”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반세기도 전에 있었던 ‘잊힌 학살’이 ‘기억의 전쟁’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는 한국의 베

베트남 전쟁 기억·망각의 한국 사회사

여전히 미흡한 참전자에 대한 연구

트남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흔히들 한국의 베트남 전쟁을 ‘잊힌 전쟁’이라 말한다. 베트남 운동이 시작된 후 잊혔던 한국의 베트남 전쟁 기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 기억은 경제발전과 반공전쟁이라는 한국의 공식 기억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학살의 기억이었다. 이 책은 1999년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는 한국의 베트남 전쟁 기억의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1999년 이전과 이후에 달라진 기억 지형과 전쟁 기억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이 ‘잊힌 전쟁’이라면 무엇이, 어떻게, 잊혔을까? 전쟁의 망각에 관해 묻는 것은 반대로 전쟁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이며, 현재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기억의 결이 만들어지는 역사적·사

회적 과정을 살피는 작업이기도 했다. 『두 번째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 제목은 전장의 전쟁 이후 전쟁 기억을 둘러싸고 진행돼 온 기억과 망각, 기억의 전쟁을 드러낸다. 이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베트남 전쟁 기억의 한국 사회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베트남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지역 생존자, 한국의 베트남 운동 참여자, 참전군인 등 한국의 베트남 전쟁 기억과 관련된 여러 주체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재현되는 한국의 ‘두 번째 베트남 전쟁’은 전쟁 세대

뿐만 아니라 세대를 넘어 지속되는 전쟁의 영향을 다시 생각게 한다. 책은 크게 2부로 구성했다. 1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철수한 이후 1999년 베트남 운동 이전까지를 중심으로 냉전 시기 한국의 베트남 전쟁 관련 담론의 변화, 전쟁의 망각에 대해 다뤘다.

2부는 한국의 베트남 운동 형성 배경에서 시작해 2018년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까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연관된 과거청산 운동의 전개와 특성, 그리고 이것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이 책은 한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과 망각, 이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 그 속에서 전개돼 온 다양한 ‘기억의 실천들’을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 책은 필자의 학문 여정에서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세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

은 박사논문을 다듬어 책으로 펴낸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 형성사』(2005)로 남한과 남베트남에서 반공국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비교역사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설명했다. 두 번째 책은 한국의 베트남 전쟁 경험·기억·기념의 문제 등을 사회사적으로 다룬 『베트남 전쟁의 한국 사회사』(2015)였다.

이번 『두 번째 베트남 전쟁』은 전쟁 이후 기억의 문제를 중심으로 했다. 세 권의 책은 식민 지배, 분단과 전쟁, 냉전과 열전, 냉전 문화, 전쟁 기억과 과거사를 둘러싼 국내외적 갈등 등으로 확장하며 굼뜨게 변화해 온 필자의 문제의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베트남·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는 아직 가지 못한 많은 길의 한 궤적일 뿐이다. 이 책이 ‘잊힌 전쟁’으로서의 베트남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한국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연구의 여백은 여전히 크다.

전쟁과 더불어 변화했던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상과 삶에 전쟁이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참전자들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하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아래로부터의 전쟁 경험과 기억을 사회사·미시사·문화사적으로 재구축하는 작업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억의 현재성을 이해하고, 기억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윤충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서평_『자비 경제학: 구약성경과 하나님 나라 경제학』 김회권 | PCKBOOKS | 456쪽

“가난한 자를 위한 총체적 회복”…공감 경제학을 꿈꾼다

올해 초 거대한 ‘전세 사기’ 사건이 한국 사회를 강타했다. 특히 청년세대의 삶을 붕괴시켰다. 인간 탐욕이 빚은 경제 비극이다. 경제 정의의 아노미(Anomi)였다.

나라 밖의 세계 정치도 정의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 자국의 부와 힘을 유지하기 위해 무력을 위장해 타국의 경제질서를 위협하고 뿌리째 흔든다. 그 핵심 원인은 역시 경제 정의 와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코로나 펜데믹까지 더해져 경제위기는 인간의 기본 삶을 위협하며 심화하고 있다.

한편 이보다 앞선 지난해, 숭실대 인문대학 기독교학과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는

기본소득은 신적 경제 정의 실천하는 자비 경제학

‘가난에 대한 태도’가 국가에 영향 끼치는 절대 원인

김회권 교수가 『자비(慈悲) 경제학』을 출간했다. 2010년부터 최근까지 히브리 성서에 준거해 한국 경제 상황을 분석한 일곱 편의 소논문을 모았다.

그 핵심 개념은 ‘자비·공감’이다. 이 자비는 신에 의해 주도된 사회적 공평과 정의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이 피조 세계에서 경제 사회적 약자의 땅을 지켜내려는 신의 속성이다(1장).

저자는 자비 경제학에 근거하여 오늘날 고용없는 경제 성장 추구에 대한 사회적 대안으로 기본소득제도를 제안한다(7장, 405쪽). 이 기본소득 논의는 토머스 페인(1737~ 1809)의 자연법적 토지 사상과 구약성경의 ‘토지 정의법’에 사상적 토대

를 둔다. 오늘날 기본소득 논의는 고용 없는 경제 성장에 대한 보편적 대안으로 제시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메소포타미아의 사회 정치경제 관련 법 조항으로부터 정치 경제의 정의에 영향을 받았다(3장). 둘째, 고대 이스라엘 사회도 약자 보호를 위한 통치를 실현한다. 특히 예언자들은 십계명의 제1계명(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을 사회정의를 위한 근본법으로 제시한다(4~6장).

셋째, 고전 경제학 중에서 공감이라는

주제에 기반한 ‘따뜻한 자본주의’가 있다. 특히 애덤 스미스(1723~1790)의 『국부론』과 그 토대인 『도덕 감정론』을, 또한 존 러스킨(1819~ 1900)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이다(2장).

자비 경제학은 오늘날 ‘고용 없는 경제 성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어 ‘인간에게 공감하는 고전 경제학’의 주장을 거쳐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 정의와 연동하는 학문융합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감의 문제였으며, 정치적 자비 실현의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기본소득 논의는 땅에 대한 만민의 권리(경작권과 소출 향유권)를 보

호하고 공감하는 자비 경제학의 당연한 실천이다. 극단적인 가난과 경제적 불균형을 방어하는 신적 경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의 주장에서 유의해야 할 부분도 있다. 저자는 고대 사회가 겪었던 ‘가난’ 자체를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에 대응하는 정치적 태도’에 주목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통치자들의 ‘가난에 대한 태도’가 국가 생멸에 영향을 주는 절대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일 요인이 오늘날 다면화된 세계에서 세분된 정치·경제적 상황 속에서도 경제와 국가 생멸의 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지는 다양한 대화가 보완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의의는 고대 경제 정의 개념에 근거하여 오늘날 과도한 금융 맹신적 삶에서 돌이키도록 촉구하며 편법과 불로소득으로 점철된 비인간적 금융경제 세계를 비판한다는 점이다. 또한 최소한이라도 자기 삶을 안정되게 보호받아야 하는 자유노동자들이 자본의 무력에 의해 변방으로 내몰린 현실에 깊이 공감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난한 자를 위한 신의 항구적 경제 정의를 표방하는 신적 자비의 정치 경제학과 인간 옹호를 내버릴 수 없는 현대의 실물 경제학이 진중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흥현

한국성서학연구소 연구원

저자가 말하다_『우주탐사의 물리학』 윤복원 지음 | 동아시아 출판사 | 484쪽

중력 극복의 우주탐사… ‘인공중력’ 으로 더 멀리

무중력·인공위성부터 태양계 행성탐사·소행성 충돌

특수상대성이론으로 푸는 미래의 유인 외계행성 탐사

우주탐사는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야하기 때문에 로켓 기술이 필수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V-2로켓에서부터 비교적 최근까지 주요 국가들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우주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간기업이 우주사업에 참여하면서 우주기술산업은 기술집약적인 차세대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책은 과거와 현재의 우주탐사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외계행성 우주탐사에 적용되는 물리학 지식을 다룬다. 이 책의 1부는 무중력과 인공위성에 대해 다룬다. 우리가 느낀다고 생각하는 중력이 사실은 중력이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해서, 미래에는 어떤 방식으로 무중력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인지를 설명한다. 지구의 자전이 인공위성과 탄도미사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설명한다.

2부는 태양계 행성 탐사에 대해 다룬다. 먼저 기초가 되는 초기 속도와 중력탈출 속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서, 중력 도움 항법을 통해 로켓 추진 없이 공짜로 우주선의 속도를 높이거나 줄이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우주탐사에서 행성의 공전을 이용하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

이 주요 내용이다.

3부는 소행성 충돌과 지구방위에 대해 다룬다. 먼저 행성은 둥근 모양이지만 소행성이나 혜성은 둥근 모양이 아닌 것은 중력의 크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공룡을 멸종시킨 소행성의 충돌 속도는 왜 그렇게 큰지,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부딪치는지, 그리고 소행성이나 혜성의 충돌로 부터 어떻게 지구를 방위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4부는 인공중력의 실체는 무엇이고, 더 나아가 중력의 실체는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장기간 유인 우주탐사에 필요한 인공중력에 대한 이해, 그리고 중력과 관성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에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5부는 외계행성을 포함한 다른 천체의 관측에 대해서 다룬다. 도플러 효과는 무엇인지, 이후 5천 개 이상의 외계행성을 찾는 데 기여한 외계행성 관측방법은 무엇인지, 지상과 우주에서 어떻게 신기루가 나타나는지, 블랙홀이 합쳐질 때 발생하는 중력파는 어떻게 관측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특히 첫 중력파 관측 논문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6부는 먼 미래의 유인 외계행성 탐사에서 일어나는 일을 특수상대성이론으로 풀어나간다. 빛이 날아가는 데도 수백년 이상이 걸리는 곳에 몇 십년만에 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주선을 어떻게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하는지, 그리고 가속에 필요한 에너지는 어느 정도인지를 설명한다. 미래의 유인 외계행성 탐사를 풀어가면서 특수상대성이론을 좀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책은 과학의 기본 원리가 어떻게 응용되는지 설명했다. 현재와 미래의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상상 속에 존재하는 내용도 과학적으로 다루었다.

우주탐사의 역사는 중력을 극복하는 역사인 것과 더불어 미래의 장기간 우주여행을 위해서는 인공중력을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중력은 우주탐사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이다. 이 책은 중력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고 중력을 좀 더 깊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책이다. 이공계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들뿐 만 아니라 이미 진학한 학생들은 이 책을 통해 탄탄한 물리학 소양을 쌓을 수 있다. 앞으로 우주와 관련된 문화 콘텐츠 분야

에서 일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도 꼭 읽어야 할 책이다.

윤복원

미국 조지아공대

전산재료과학센터 연구원

통찰의 재미_『우리편 편향』 키스 E. 스타노비치 지음 | 김홍옥 옮김 | 바다출판사 | 382쪽

인지 엘리트 ‘교수’…자기편만 추종하는 이유

스타노비치 캐나다 토론토대 명예교수(응용심리학·인간개발학과)의 『우리편 편향』은 인간의 비합리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확증편향, 결과편향, 선택적 지각 등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자가 논의한 ‘우리편 편향’은 인간의 단순한 심리적 습성이 아니라 인간이 잘못된 믿음을 갖는 본질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특히 그의 책은 최근 세계적으로 심화하고 있는 보수·진

인지능력 향상돼도 점점 강화되는 우리편 편향

견해는 개인적 합리성보다 집단적 사고로 형성

보의 극단적 정치 양극화와 이념적 분열, 당파성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잘 설명하고 있어서 세계사적 변화에 대한 통찰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저자가 제공하는 연구의 차별적 가치는 우리편 편향이 다른 편향과 달리 인지 능력에 의해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즉, 다양한 인지 편향은 인지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지만, 유독 우리편 편향은 오히려 더 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편 편향은 나이 등의 인구통계적 차이나 개인차, 인지능력과도 상관이 없을 뿐더러 교육 수준과도 관련이 없어서 소위 사회의 리더라는 엘리트 지식인 집단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TV 토론 프로그램에 지성의 대표 토론자로 나온 교수들의 주장이 전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에서 쉽게 확인된다. 이들은 각자 어떤 집단 정

체성을 갖는 순간 우리편의 입장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기존의 심리학적 입장과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진화론적 인식론에 근거해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합리적 사고를 통해 개인이 신념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밈(meme)의 이해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편 편향은 개인이 어떤 신념을 갖는 차원의 문제가 아

니라 거꾸로 어떤 신념이 사람들을 포섭하고 확산되는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다. 개인은 한 집단이 공유하는 밈을 신념의 복제자로서 무의식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다. 이는 사람들이 문화적 인공물을 흡수할 때는 의식적 흡수가 아닌 무의식적 결정을 통한다는 심리학자 대니얼 데닛의 설명, 사람들이 도덕 행동 등 자신의 선언적 지식, 행동 등을 획득하는 것이 선천적 성향과 무의식적인 사회적 학습의 조합이라고 한 조너선 하이트 등 여러 심리학자들의 설명과도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편가르기 본성을 설명하는 ‘우리편 편향’은 내집단의 의견은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외집단의 의견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함으로써 사회를 분열시키고 공동체와 공익을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가짜 뉴스의 확산은 우리편 편향이 낳은 대표적인 사회적 병폐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

경재앙,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이슈를 바라보는 해석에서 이분법적인 분화가 심해지고 있는데 이는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파편화된 미디어의 영향으로 우리편 편향을 추동하는 사회적 구조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문제는 이로 인해 의사소통의 공유지 영역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편 편향이 문제가 되는 지점에 대해 저자는 그것이 단순히 신념에 그치지 않고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확신으로 변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자신의 신념을 지지한다고 믿는 증거를 편향되게 해석하는 신념 편향과 증거를 상관하지 않는 우리편 편향을 심리학적으로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가치관에 근거해 동일한 증거라 할지라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고 말하는 저자는 집단 정체성이 우리편 편향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갖게 하는 핵심원천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우리편 편향의 원인과 특이성 그리고 그 대응방법에 이르기까지 인지심리학‧사회심리학‧행동경제학‧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의 연구 근거를 제시하며 잘 설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신념이 자기 확신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는 길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의 견해 대부분은 개인적 합리성보다 공동의 집단적 사고에 의해 형성되며 우리는 집단 충성

심 때문에 그 견해들을 고수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김선진

경성대 미디어콘텐츠학과 교수

박인성의 중국 현대사

박인성 지음 | 한울 | 480쪽

저자는 이 책의 원고 내용을 유튜브 강좌로 제작하면서 원래의 원고 내용을 적지 않게 수정·보완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말한다. 좌경 모험주의 신념과 권력의 작동 방식, 그로인한 영향과 결과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교훈을 도출해야 하는가? 중국공산당사를 가로지르는 저자의 질문에 각자의 답을 찾기를 바란다.

미학

벤체 나너이 지음 |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196쪽

‘미학’이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기다림의 미학, 순간의 미학, 관계의 미학 등 주제어가 되는 명사 뒤에 ‘~의 미학’이라는 말을 붙이면 왠지 더 분위기 있고 시적인 느낌도 나는 것 같다. 제품 광고나 예술 작품을 논평하는 글에서 우리는 예의 ‘~의 미학’이라는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미용실이나 성형외과를 홍보할 때도 ‘미학’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단어로 등장한다.

루치아노 플로리디, 정보 윤리학

목광수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148쪽

옥스퍼드대 철학과 교수이자 21세기 정보 철학을 선도하는 저자는 정보 시대에 발맞춰 윤리학의 토대를 재구축한다. 플로리디의 '정보 윤리학'은 인간뿐 아니라 인공물까지 도덕 공동체에 포함하는 탈인간중심 윤리 패러다임으로, 인간은 전체 정보 세계를 돌보고 번영시킬 책임을 진다.

성악의 기술

박명기 지음 | 시우 | 184쪽

이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가 40년을 넘게 정리하고 고로고 다듬은 내용들이다.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어느 페이지의 어느 문장을 먼저 읽어도 그 자체로 완결되는 잠언집과도 같다. 저자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훌륭한 전문가들이 그들만의 독보적인 노하우를 체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멋진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리더의 언어사전

김동훈 지음 | 민음사 | 360쪽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에서 미래 인재, 자기성찰, 리더십 등을 강의하면서 기업교육을 기획해 온 저자는 그동안 기업교육 강사들의 요청으로 기업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개념들을 가르쳤다. 이 책은 그 가운데 25개 키워드를 선정해 한 권에 담은 유용한 개념 사전이다. 어원에 충실한 명료한 개념을 설명해 준다.

나노화학

장홍제 지음 | 휴머니스트 | 328쪽

오늘날 인류는 10억 분의 1미터, 즉 나노미터 단위의 물질을 다룰 수 있게 됐다. 기존 물질과 전혀 다른 독특한 특성을 지닌 나노물질은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고 있으며, 이제 일반인도 나노과학이나 나노기술 같은 용어를 친숙하게 느낀다. 하지만 정작 나노과학을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강화도: 나를 채우는 섬 인문학

노승대 외 10인 지음 | 불광출판사 | 256쪽

인터넷에 정보가 쌓일수록, 검색에 매달릴수록 기억과 생각하는 노력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안다고 생각했던 강화에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늘 먹었던 먹거리, 보던 풍경, 찾았던 핫스팟 말고 다른 것은 없을까? 여행으로만 접근하기엔 너무 아쉬운 강화에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숨어 있을까?

안전 이별

인생학교 지음 | 배경린 옮김 | 알랭 드 보통 기획 | 오렌지디 | 176쪽

왜 이별은 이토록 어려울까? 누구나 한 번쯤 이별을 고민하며 속수무책이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사랑이 지나가고 남아 있던 감정까지 모두 소진하면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우리 관계는 괜찮은 걸까?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까? 자문하지만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헤어질까 말까 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하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정의 순간을 기약 없이 미룬다.

분야별 신간

인문

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완벽한 방법 | 앤서니 맥가윈 지음 | 최이현 옮김 | 니케북스 | 464쪽

미학 | 벤체 나너이 지음 | 박준영 옮김 | 교유서가 | 196쪽

시민권 | 리처드 벨러미 지음 | 황소희 옮김 | 교유서가 | 252쪽

지식의 지도 | 바이얼릿 몰러 지음 |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428쪽

역사

강아지풀에서 코뿔소 뿔까지 | 신동원 외 4인 지음 | 책과함께 | 408쪽

박인성의 중국 현대사 | 박인성 지음 | 한울 | 480쪽

별들의 흑역사 |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576쪽

안전 이별 | 인생학교 지음 | 배경린 옮김 | 알랭 드 보통 기획 | 오렌지디 | 176쪽

한국전쟁의 기원 1, 2-Ⅰ, Ⅱ | 브루스 커밍스 지음 |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1천954쪽

문학-에세이

강화도 나를 채우는 섬 인문학 | 노승대 외 10인 지음 | 불광출판사 | 256쪽

꽃을 피우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격 |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Artichoke Publishing House) | 204쪽

원시별 |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412쪽

정치-사회

시진핑의 중국몽과 미디어 전략 | 정원교 지음 | 나남 | 380쪽

자기계발

리더의 언어사전 | 김동훈 지음 | 민음사 | 360쪽

예술

성악의 기술 | 박명기 지음 | 시우 | 184쪽

신냉전 시대, 우리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나 ⑧ 제3세계 재평가2

제3세계가 꿈꾼 ‘더 평등한 세상’,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다

‘제3세계’란 말은 1952년 처음 등장했지만, 이 단어가 지칭하는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주변적’ 역사의 기원은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롭게도, 현대사에서 제3세계가 가지는 주변성은 자본주의적 개발을 뛰어넘는 새롭고 정의로운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1884년, 독일 제국의 설계자이자 ‘철혈(鐵血) 재상’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식민제국들, 오스만제국, 미국의 대표를 베를린으로 소집한다. 훗날 ‘베를린 회담’으로 알려진 자리에서 정치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효과적인 지배를 논의했다. 회담 결과, ‘아프리카 분할’로 알려진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이 촉발됐다. 학계에서는 이를 ‘신제국주의 시대’라고 칭한다.

민족자결권, 식민지 이후의 전쟁

제3세계는 극히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고 전부 식민지였거나 미국의 손아귀(라틴아메리카)에 놓여 있었다. 유럽

영국 정치인 세실 로즈가 식민지인 카이로와 케이프타운을 통신선으로 연결한다는 의미가 담긴 삽화다.

그림=위키피디아

왼쪽 사진은 제3세계의 역사를 해방이라는 비전과 대안적 미래의 상상을 중심으로 살핀 『Inventing the Third World』 (2022) 표지.

오른쪽 사진은 198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주도해 제출한 보고서 「North-South: A Programme for Survival」에 포함된 지도다. 인구 1인당 국내총생산 비율을 가지고 지구적 북반부와 남반부를 나눈 선은 보고서 작성자의 이름을 따 브란트 라인이라고도 한다. 이미지=위키피디아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제3세계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막을 역량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구호가 추구한 반식민주의적 국제주의는 대안적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제3세계는 더 평등한 국제질서 상상에 참조해야 할 역사적 경험이었다.

제국(일본 포함)은 중심부에서 나오는 여러 불만을 식민지를 통해 외부로 돌렸다. 제국 관료들은 식민지의 광활한 시장, 풍부한 자원, 값싼 노동력을 영구적으로 장악하려고 했다. 이를 거든 논리가 바로 ‘백인의 의무’, 즉 식민지를 현대화하여 유럽 제국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중 하나는 제3세계에 대한 불평등한 지배였다. 미국과 유럽이 식민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동안, 나치는 독일 민족의 ‘생활권’ 개념을 내세우며 중동부 유럽에 식민제국을 건설하고자 했고, 일본은 서양 식민열강에 맞서 아시아가 함께 저항하자는 이념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사여구로 포장했다.

이러한 구도에 균열을 낸 것은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두 지도자는 전후 세계질서의 원칙으로 ‘민족자결권’에 동의했다. 식민지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역사학자 노경덕이 밝혔듯, 현실에서는 원칙보다 국익이 우선시됐다. 또 루즈벨트의 후임 미국 대통령들은 제3세계가 주권을 운용하기 위해선 계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도차이나반도에서는 1946년부터 다시 긴 투쟁이 시작되었고, 프랑스령 알제리에서는 1954년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제3세계, 대안적 세계질서의 기원

1950년대 중반, 제3세계 정치인들은 비슷한 역사적 경험(식민 지배)과 정치경제적 지향(경제 개발)을 바탕으로 세력 규합을 시작했다. 역사학자 신디 어윙에 따르면, 실론(現 스리랑카)·버마·인도·인도네시아·파키스탄의 지도자들은 1954년 콜롬보 국가(Colombo Powers)를 결성, 이듬해 인도네시아의 휴양 도시 반둥에서 열린 반둥회의를 주도했다. 반둥회의에 참여한 29개국 국민의 수를 합치면 당시 지구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15억 명에 달했다. 이들이 내건 기치는 반제·반식민국주의를 위한 연대였다. 연대의 목소리는 1961년의 비동맹운동, 1966년의 삼대륙 회담으로 이어졌다.

최근 출간된 프린스턴대학의 역사학자인 기안 프라카시와 제레미 아델만이 엮은 『제3세계 만들기』(Inventing the Third World)는 냉전기 제3세계 문화사 연구의 최전선을 보여준다. 프라카시 교수는 남아시아, 아델만 교수는 라틴아메리카 전공자이다.

『제3세계 만들기』는 제1·제2세계가 경합을 벌이는 ‘빈 장소’로서의 제3세계가 아닌, 지역 관료·문인·활동가들이

제기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안적 세계질서의 기원을 다룬다. 최근 냉전사 연구가 제1세계·제2세계와 제3세계의 교환에서 제3세계의 주체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 책에 실린 12편의 글은 냉전사 연구에서 나아가 제3세계가 상상하고 실천한 좀 더 평등한 미래를 문화사적 측면에서 탐구한다.

값진 역사적 경험 ‘제3세계주의’

이 책은 연대를 통해 더 평등한 세계질서를 추구했던 열망을 제3세계주의라고 규정한다. 제3세계주의가 세계적으로 가장 큰 호응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내부의 균열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제3세계의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들은 자국이 개발도상국으로 남아있는 이유로 불평등한 세계시장을 지목했다. 이러한 경제적 식민체제를 바꾸기 위해 그들이 내놓은 방안이 바로 1974년 UN이 선포한 신경제질서(NIEO)였다. NIEO의 핵심 메시지는 서독의 총리를 역임한 빌리 브란트가 펴낸 보고서에 잘 드러난다.

물론 제3세계주의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 압도적인 세계 시장의 무게를 연대의 구호만으로는 견딜 수 없었다. 당시 제3세계는 냉전의 핵심을 이념(동서 갈등)에서 경제(북남 갈등)로 보는 탁월한 이해 방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경제 개발과 무역을 수행하는 행위자는 엄연히 국민국가였고, 제3세계는 이러한 국제정치에 대한 대안적 규칙을 만들 수 없었다. 1980년대 지구적 부채위기가 불거지면서, 제3세계 주의는 결국 꿈으로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3세계가 꿈꾼 더 평등한 세상을 향한 연대는 무가치했는가? 이 책의 종장을 작성한 역사학자이자 변호사인 새뮤얼 모인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제3세계주의는 신자유주의의 부상을 막을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이 구호가 추구한 반식민주의적 국제주의는 오늘날까지 대안적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한다. 제3세계는 더 평등한 국제질

서 상상에 반드시 참조해야 할 역사적 경험이었다.

우동현

카이스트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조교수

UCLA에서 과학기술사(북한-소련 관계사)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이 게재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저주받은 원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이 있고,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총서 36권 및 38-39권을 공역했다. 주요 관심사는 냉전사, 핵역사, 환경기술사, 디지털역사학이다.

글로컬 오디세이

반목하던 이란과 사우디아리비아, 결국 손잡을까

무함마드 하산 모자파리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 HK연구교수

국립 델리 이슬람대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산외대 지중해지역원에서 연구·강의하고 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서아시아 지역과 이슬람 국가 사이에서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국가로, 양국 모두 석유와 가스의 주요 수출국이다. 냉전 시기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까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친서방적 외교로 미국이나 유럽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제외교는 정치, 경제, 군사·안보 등을 폭넓게 다뤘다. 공통의 목표로 국내외적으로 협력했고, 이러한 협력과 조화는 각국의 안정과 안전에 기여했다.

지난 40년 동안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정치·국제적으로 다른 입장을 고수해왔다. 최근 레바논·시리아·예멘·바레인 등지에서 발생한 내전에서 양국은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며 각자의 세력을 지원했다. 이러한 대리전쟁은 양국의 적대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일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했고, 이란은 예멘 내전에서 후티 반군을 지원했다. 시리아 내전에서 이란은 시리아를 군사·금융적 차원에서 지원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는 반군세력과 반정부 외국 군인을 지원했다. 바레인 반정부 시위와 아랍의 봄 중에도 이란은 민중을, 사우디아라비아는 정부를 지원하는 등 서로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팽팽한 긴장의 역사를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사례들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보다 건

설적인 접근을 보인다. 지역적 안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지속되는 갈등으로 인한 인권문제와 국제사회의 개입에 힘입어 국내외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노력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특히 긴장 완화를 위한 노력은 높은 수준의 지지와 외교적 상호작용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 9일, 중국의 중재로 이란 최고 국가안보회의 의장인 알리 샴카니와 사우디 아라비아 무사드 빈 모하메드 알 아이반 국가안보 보좌관이 중국에서 만나 회담을 진행한 것이 그 예이다. 양국 대표단은 주권 존중, 상호 간섭 금지, 기존 체결된 안보 협력에 관한 협정의 실행을 비롯해 △경제 △상업 △투자 △기술 △과학 △문화 △스포츠 △청소년 협력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를 강조했다. 또한 이들은 2021년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양국 협상을 주최한 이라크와 오만, 그리고 협상의 성공을 위해 자신들의 회담을 주최한 중화인민공화국에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교적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려는 의도를 명백히 하기 위해 신임 대사를 임명했다. 두 나라 간의 관계 정상화 선언 이후, 각 나라의 대표단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이란 외무장관과 대표단은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과 회동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살만 빈 압둘 아지즈 국왕은 이란 대통령 에브라힘 라이시의 관계정상화를 환영하며 사우디아라비아 방문을 공식 초청했다. 아울러, 에산 칸두지 이란 재무부장관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경제협력강화 방안 마련),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아랍 연맹 회의 참석을 위한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사우디아라비아-예멘 후티 반군 회담,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 이라크, 레바논의 정치·안보 이슈의 해결을 위한 공동협력 등 다양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이란의 서아시아 내 참여도 증가, 페르시아만과 홍해의 군사적 긴장 완화, 페르시아만 지역의 안

지난 40년 동안 서아시아에서의 사건을 살펴보면, 각 나라의 대외 간섭이 자원의 파괴, 인명 피해 등 부수적인 피해를 유발해 왔다. 사진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는 소련군이다. 사진=위키피디아

보와 안정을 위해 통합된 군사력을 확립 가능성 제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영향력 견제, 이란-사우디아라비아 공동 프로젝트의 투자 안정성 증가 등 중동지역 안정을 위한 긍정적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려는 여전히 남아있다. 최근 협상에서 중재의 역할을 한 중국과 같은 국가들이 양국 간 관계에 개입할 위험이 잔존하고 있다. 지난 40년 동안 서아시아에서 발생한 사건을 살펴보면, 각 나라의 대외 간섭(특히 아프가니스탄과 기타 지역 국가에서 소련과 미국의 간섭)이 자원의 파괴와 인명 피해 등 부수적인 피해를 유발해 왔다.

소련의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침략과 미국의 간섭은 장기적인 충돌과 불안정, 그리고 인명 피해를 야기했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지속적인 정치적 불안정과 그로 인한 폭력적 상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군사적 간섭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긴장을 가중시키고 갈등을 심화시키며 권력의 공백을 만들어 극단주의 그룹과 비국가 단체들을 생성시켰다. 결국 피해를 입은 국가는 폭력과 강제 이주를 비롯한 인도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지난 군사적 간섭의 실패를 인식하고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상호 존중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평화, 대화와 외교적 해결의 추구는 서아시아의 갈등을 해결하고 불안정의 근본 원인에 대응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중동지역은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을 통해서만 지속가능한 평화·발전·번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경희대·동국대·부산대 등 13개 대학, ‘소프트웨어 중심대학’ 선정

경희대‧동국대‧부산대 등 13개 대학, ‘2023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으로 선정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일반 트랙 대학에 최장 8년간 150억원, 특화트랙 대학에 최장 6년간 55억 원을 지원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는 지난 7일 일반 트랙 11개 대학과 특화 트랙 2개 대학을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으로 선정했다. 일반트랙 대학에는 각 9억5천만 원, 특화트랙에는 각 4억7천5백만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일반트랙에는 경남대, 경희대, 고려대, 군산대, 동국대, 동아대, 부산대, 순천대, 영남대, 연세대, 한동대가 선정됐다. 신한대와 한라대는 특화트랙 대학으로 선정됐다.

일반트랙은 입학정원 100명 이상, 소프트웨어 관련 대학원을 운영하는 학교 중에서 선발한다. 특화트랙은 중소규모 대학을

일반트랙 경쟁률은 3.3:1, 특화트랙 경쟁률은 5:1을 기록했다. 사진은 부산대 전경.

대상으로 하며, 소프트웨어 학과 정원 및 대학원 운영요건이 없다.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은 대학 내 디지털 교육뿐만 아니라, 초·중·고교생 대상의 소프트웨어 기초교육 지원, 온라인 교육콘텐

츠 개발·공유, 지역 기업과의 산학협력 등 대학별 특성에 맞는 다양한 사업 방향을 설정해 운영한다.

2015년에 시작된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은 산업체 수요기반으로 교육과정을 개편

하고 소프트웨어 전공 정원을 확대했다. 또한, 비전공자 대상 소프트웨어 융합교육 등을 통해 지난해까지 전공 인력 4만 명과 융합인력 2만7천 명을 양성했다.

올해 선정 대학 중 경남대, 경희대, 고려대, 군산대, 부산대 등은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융합인재 양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아대는 지역 맞춤형 디지털 융합혁신 인재 양성에, 한라대는 모빌리티 산업 분야 인재 양성에 주력할 예정이다.

오용수 과기정통부 소프트웨어정책관은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은 성공적인 디지털 전환을 이끌 핵심인재 양성에 기여해왔다”며 “소프트웨어 중심대학이 지역 및 기업들과의 활발한 협력을 통해 산업체의 인력난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지속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신다인 기자 shin@kyosu.net

국립중앙도서관, ‘지식정보 통합검색서비스’ 개시

국립중앙도서관이 국내외 지식정보시스템 18개를 한곳에서 검색할 수 있는 ‘지식정보 통합검색서비스(이하 통합검색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지난 7일 밝혔다.

‘통합검색서비스(onnaru.nl.go.kr)’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운영하는 12개 정보서비스시스템과 ‘미국의회도서관’ 등 6개 외부 연계 시스템의 지식정보자원을 한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합검색 대상인 국립중앙도서관 시스템은 △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 △국가전자도서관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정책정

보포털 POINT △조선총독부관보 △OASIS(웹자원 아카이브) △Open Access Korea △국가자료종합목록 △한국고문헌종합목록 △Linked Open Data △도서관정보나루 △ISNI-Korea 등으로 책 정보를 비롯하여 저자, 웹자원까지 검색할 수 있다.

외부연계 지식정보시스템은 △네이버 도서 △구글 학술검색 △해외OA(Open Access) △미의회도서관 △호주국립도서관 TROVE △일본국립국회도서관 등으로 국내외 정보자원시스템과 연계돼 더욱 다양한 정보를 한 번에 찾을 수 있게 됐다.

지식 정보 통합검색사이트 메인 화면

또한 ‘통합검색서비스’는 이용자가 스스로 주제를 선정해 정보컬렉션을 만들고, 다른 이용자와도 공유할 수 있는 ‘링크 컬렉션’ 기능을 제공한다.

김수정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정보기획 과장은 “통합검색서비스를 통해 국립중앙도서관이 제공하는 다양한 지식정보를 국민들이 보다 쉽고 편하게 검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지식정보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신다인 기자 shin@kyosu.net

부경대에 한국 첫 도핑방지 강의 생긴다

KADA‧WADA‧셔브룩대와 협약

국제 스포츠행정가 양성 협력

부경대가 한국 첫 도핑방지 강의를 개설한다.

부경대와 한국도핑방지위원회(이하 KADA), 세계도핑방지기구(이하 WADA), 캐나다 셔브룩대학교 도핑방지연구소는 지난 2일 부경대 총장실에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번 협약은 2025년 부산에서 열리는 2025 WADA 총회를 앞두고 도핑 방지 관련 학문의 저변확대와 도핑방지 연구센터 건립, 국제 스포츠행정가 양성 등에 협력하기 위한 것이다.

부경대는 지난해 위톨드 방카 WADA 회장 초청 특강에 이은 이번 협약으로 한국

장영수 부경대 총장(가운데)과 위톨드 방카 WADA 회장(오른쪽), 김금평 KADA 사무총장이 협약식을 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첫 도핑방지 강의를 내년 개설할 예정이다. 이 강의는 KADA의 도핑방지 표준교재 등

협조를 받아 스마트헬스케어학부 해양스포츠전공에 개설된다.

12주차에 걸친 이 강의는 도핑의 역사를 비롯해 세계 도핑 방지규약, 도핑검사 프로그램 운영, 금지약물, 위반 사례, 교육 등 도핑방지 분야를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다룬다.

부경대생들은 WADA 인증 도핑방지 석사학위과정을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는 캐나다 셔브룩대의 학위과정도 온라인으로 이수할 수 있게 됐다.

부경대와 KADA는 2025 WADA 총회에 참석하는 WADA,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과 학생들의 교류 시간도 마련해 국제 스포츠행정가로서의 역량 강화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김대희 부경대 교수(해양스포츠전공)는

“부경대의 스포츠, 의공학, 스마트헬스케어 분야 강점을 도핑방지 분야와 접목해 유전자 도핑, AI 활용 도핑방지 프로그램 개발, 법제도·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장영수 부경대 총장은 “우리 대학의 특성화 역량을 바탕으로 국제기구와의 산학협력을 통해 도핑방지 분야 학문 발전과 인재 양성, 지역산업 발전 등 상생발전 할 수 있는 선순환 체계를 구축하겠다”라고 밝혔다.

김금평 KADA 사무총장은 “이번 업무협약은 국내‧외 도핑방지 분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제기구와의 더욱 강력한 협력체계를 통해 도핑방지 학문적 저변확대와 국제 인재 양성에 기여하는 세계적 모범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다인 기자 shin@kyosu.net

경희대, 양자컴퓨팅 알고리즘 시장 개척 나서

양자컴퓨팅 알고리즘 기반 고기능성 광학 필름 개발

경희대가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하는 ‘양자컴퓨팅 기반 양자이득 도전연구’ 사업에 선정됐다.

경희대는 헥사솔루션과 미국 노터데임 대학과 함께 컨소시엄을 이뤄 ‘포토닉스 혁신 설계 및 고기능성 광학필름 개발’을 주제로 사업에 지원해 선정됐다. 물리, 재료, 전자공학, 인문학 분야의 전문 인력이 참여해 융복합적 연구를 수행할 계획이다.

고기능성 광학 필름은 스마트 모빌리티, 초고속 데이터 통신 등 미래 기술 분야에서 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차세대 주요 광학 부품이다. 고기능성 광학 필름은 가시광선은 투과하면서 근적외선 및 중적외선은 반사하거나, 마이크로파는 반사하면서 가시광은 투과하는 등 매우 복잡하고 복합적인 기능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

능을 구현하는 광학 구조 디자인을 설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설계변수가 증가함에 따라 설계 소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양자 컴퓨터로 광학 구조 설계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적합한 양자컴퓨팅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고기능성 광학 필름을 설계 및 제작해 그 성능을 평가할 예정이다. 양자 컴퓨팅 알고리즘의 성능을 검증하기 위해 고전 컴퓨터 및 슈퍼컴퓨터로 생성한 알고리즘과의 비교도 진행된다. 또한 해당 결과를 기반으로 고기능성 광학 필름의 조기 시장 진출을 꾀한다.

연구 책임자인 이응규 경희대 교수(전자공학과)는 “이번 과제로 개발될 양자컴퓨팅 알고리즘은 광학설계 분야 이외에도 신소재 개발, 응집 물리 분야, 통신 보안 등에도 활용될 수 있다”며 “양자컴퓨팅 활용 기술 특허 및 기술이전으로 산학협력까지 확산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故 김진균 서울대 교수, 전남대 ‘후광 학술상’ 수상

후광학술상 선정위원회는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해 온 고 김진균 서울대 교수를 제16회 후광학술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고 김진균 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으며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서울대 상대 교수로, 이듬해인 1975년부터 2003년 2월까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김 교수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며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부터 4년간 해직되기도 했다.

해직 이후 제자들과 가졌던 연구 모임은 1984년 한국산업사회연구회로 이어지는 토대가 됐고, 현재 산업사회학회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1988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공동의장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

후광학술상은 전남대가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며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한반도 평화정착, 미래창조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있는 국내외 학자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후광학술상

의 이전 명칭은 전남대 민주평화인권학술상이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2007년 제1회 후광학술상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민주·평화·인권 분야에 우쓰미 아이코(内海愛子) 일본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가, 미래창조분야에 ‘네이버’가 각각 수상했다.

신다인 기자 shin@kyosu.net

공주대 제8대 총장에 임경호 교수

공주대 제8대 총장에 임경호 교수(스마트인프라공학과‧사진)가 임명됐다. 임기는 4년이다. 임 신임총장은 서울시립대 환경공학전공을 졸업 한 후 카이스트에서 토목공학 공학 석‧박사 학위를 마쳤다.

임경호 총장은 지난 2월에 총장임용후보자 선거에서 미래 50년을 준비하는 새로운 전통의 시작이

라는 전략체계 구상으로 △획기적 재정확충 △디지털 전환 미래 인재 양성 △기획 및 디자인 씽킹 센터설립 △기초・인문・예술진흥 △캠퍼스 재구조화 △입학자원 다각화 등의 대학발전 전략을 제시했다.

한편, 임 신임총장은 공주대에서 산학연구본부장 및 산학협력단장, FAIR사업단 단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그는 한국도시환경학회 편집위원장, 충청남도 지방건설 심의위원 및 계약심사 심의위원, 당진시・아산시 기술자문위원 등 활발한 대외적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원장 취임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한문학과‧사진)가 한국고전번역원 제6대 회장에 취임했다. 김 신임 원장은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만국립사범대에서 중문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중문과 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이사, 한국고전번역학회 회장,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장, 한국실학학회장, 퇴계학연구원 부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7년 출범한 번역원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국내 주요 고전문헌을 수집·정리·연구·보급함으로써 한국학 연구 기반을 구축하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데 이바지할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부 산하 학술기관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김 원장은 한국 고전문헌 현대화의 중심 기관의 수장으로서 고전문헌 연구 및 정리·번역, 성과 보급과 대중화, 인력 양성을 위한 중추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은주 서울대 교수, 국제커뮤니케이션학회장 취임

이은주 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과‧사진)가 한국 학자로는 처음으로 국제커뮤니케이션학회(이하 ICA) 회장에 취임했다. 임기는 1년이다.

이 교수는 지난달 25~29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ICA 제73회 연례학술대회에서 취임했다. 아시아 여성학자가 ICA 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이번

이 처음이다.

이은주 교수는 미디어 심리학 분야의 연구자로, 다양한 디지털 소통 양식의 개인적·사회적 효과를 탐구해왔다. 특히 뉴스 댓글과 여론, 소셜 미디어 이용과 정신건강, 허위정보 및 교정, 인간-AI 커뮤니케이션 등 중요한 사회적 함의를 가지는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은주 교수는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ICA 동아시아 지역 선출이사(2009-2012)와 국제 저명 학술지인 <미디어 심리학(Media Psychology)> 공동편집위원장 등을 거쳐, 비영어권 학자로는 최초로 언론학 분야 3대 학술지로 꼽히는 <휴먼 커뮤니케이션 리서치, (Human Communication Research)>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김재열 협성대 교수, 한국공간구조학회장 선임

김재열 협성대 교수(건축공학과‧사진)가 12대 한국공간구조학회 회장에 선출됐다. 임기는 2년이다.

김재열 신임 회장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에서 건축구조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

다. 2003년 3월부터 협성대 건축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재는 이공대 학장을 맡고 있다. 한국공간구조학회(KASS)는 설립 당시 쉘·스페이스프레임·막 및 케이블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전문가를 중심으로 시작했다. 현재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더 넓게, 더 높이를 추구하며 우주 대공간 분야를 아우르는 확대된 구조공학 전문가들의 모임 단체다.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분야의 기술 국산화와 해외 건설시장의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2001년 설립됐다.

김재열 신임 회장은 초대 총무이사를 지낸 창립 멤버이며, 편집위원장, 부회장, 기술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이대용 군산대 교수, 에너지혁신인재포럼 우수상 수상

이대용 군산대 교수(풍력에너지학과‧사진)가 지난 1일 산업통상자원부 주관으로 개최된 ‘2023 에너지혁신인재포럼 성과발표회’에서 과제운영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에너지혁신인재포럼’은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 인력양성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전국 60여 개 대학

들과 LG화학, 두산에너빌리티 등 국내 대표적 에너지기업들이 모여 우수 성과들을 발표하고 공유하는 자리이다.

이대용 교수는 “해상풍력 지지구조 분야 국내 우수인력 양성과 핵심 요소기술의 국산화 시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책임감을 갖고 더욱더 정진해 나가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포스트 탈냉전, 미중 헤게모니 전쟁에서 살아남기

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를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부터 동아시아,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과학기술, 철학과 담론을 인문·사회·자연과학이 상호 연결성을 통해 새로운 학문적 담론 형성을 시도한다. 지난달 20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가 「미·중 관계와 패권 경쟁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강은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국제정치경제)의 「다원주의적 국제 질서의 철학과 비전」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냉전의 끝은 한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전 세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며 군림했던 것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탈냉전과 더불어 미국은 초강대국으로 홀로 섰다. 2차 세계 대전이 종전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미국은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의 책임을 떠맡게 됐다. 그런 과제는 여전히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공산주의는 죽었다. 그러나 끝난 것은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한 냉전시기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이지, 철학적·문화적·경제적 갈등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다.

탈냉전 시기 국제정치의 장에서 가장 새로운 것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세계의 정치에서 확립된 미국의 헤게모니가 새로이 부상한 중국에 의해 도전받게 된 것이다. 미‧중의 경쟁적 관계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경쟁의 중심적인 장이 유럽이 아니라, 바로 태평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 연장선상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이라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존 아이켄베리는 태평양을 장으로 하는 미중 간 경쟁을 “이중의 위계(dual hierarchy)”라고 규정한다. 그가 한 논문을 통해 그렇게 말했던 것은,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앞세운 중국의 급부상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힘의 균형을 급격하게 변화시켜, 미국과 경쟁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중간적 국가들은 안보는 미국에, 경제 교역은 중국에 의존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능의 공간이 만들어졌고, 이 지역에서 양자 강대국 운영 체계가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분석하면서 그렇게 전망했다.

7~8년 전 이 논문이 발표됐을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이 순조롭게 작동할 수 있는 긍정적인 전망과 아울러 설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컴퓨터사이언스‧우주‧군사‧과학기술 발전과 함께 빠르고도 지속적인 경제 및 산업 발전을 거듭해왔던 중국이 이제 곧 미국을 추월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갖춘 세계의 최대 경제 대국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중국은 아이켄베리 논문이 말했던 것으로부터 불과 10년도 안 된 짧은 기간에

“일대일로(一帶一路)” 확대를 앞세워 아시아‧인도태평양 지역을 넘어서, 아프리카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유럽을 넘어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정치‧군사‧외교적 영향력이 미치는 거의 모든 영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국제정치학자 존 J. 미어샤이머처럼 사실/현실주의를 대표하는 국제정치학자는, 프란시스 후쿠야마나, 아이켄베리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미국과 중국 간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중간 전쟁 가능성을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로 비유한 국제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은 전쟁의 가능성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여지를 남겨두지만, 양국 간의 전쟁 위험은 상당하고, 그럴 만큼 복합적이고,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의 지역은 셋으로 나누면 서유럽, 중동, 동아시아로 나눠 볼 수 있다. 인도‧태평양지역은 냉전의 시작과 더불어 그 구조와 특징이 형성되기 시작해서 19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경제 발전과 1980년대 말까지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곳이고, 중국의 개혁개방에 의한 발전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지역이다. 2001~2018년 사이, 미국을 제외한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의 국내 총생산의 합은 무려 두 배나 성장해 미국 경제의 규모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같은 기간 이 지역에서의 군사비 지출은

“오늘의 인도-태평양 지역은 기존 미국의 일극체제 헤게모니와 이 지역의 강국으로 등장한 중국 간의 경쟁이 현실로 나타나는 현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지역의 중간적 국가들이 대응하면서 ‘이중의 위계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지역의 새로운 국제정치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이 만들어지고 있다.”

2.5배나 증가했다. 특히 경제적 자유주의의 수용을 통해, 또는 그와 병행해 한국과 대만은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도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경제 발전에 관한 한 한국과 대만, 중국은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중국은 빠른 경제 성장에 힘입어 국방비 예산을 증액해온 결과, 최근에는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의 국방비 지출 총합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은 이 지역의 어떤 나라에도 군사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국방비 예산에 힘입어, 또한 어떤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현대적인 군사력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중국 사회주의는 세 국면으로 발전해왔다고 말한다. “마오의 지도력에 의해 중국은 일어섰고, 덩의 리더십에 힘입어 부유한 나라로 성장했고, 시 정부하에서 중국은 강하게 될 것이다”라고. 오늘날 중국은 여러 면에서 마르크시즘-레니니즘보다는, 레니니즘을 신성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분명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전위로 규정하면서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예비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목적은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데 있지 않았다.

그보다 당은 자본주의를 수용하고 끌어안아 그것을 그 자신의 목적, 즉 당의 항구적인 존립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오늘날 당은 자본주의를 마르크시스트 이상으로의 회귀를 강조하고 있을지 모르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정치학)는 “탈냉전 시기 국제정치의 장에서 가장 새로운 것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세계의 정치에서 확립된 미국의 헤게모니가 새로이 부상한 중국에 의해 도전받는, 미-중 경쟁적 관계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라며 “이 경쟁의 중심적인 장이 유럽이 아니라, 바로 태평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이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만,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시진핑이 강조하고 있듯이 근검절약과 겸양이라는 공산당의 가치이고, 그것이 또한 중국 경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르러 세계는 강대국으로 빠르게 등장한 중국을 대면하게 되면서, 그것이 지닌 국제 정치에 대한 영향과 그 변화가 불러올 결과에 대

해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다. 국제정치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갖는 지정학적 함의와 나아가서는 중국의 등장과 유사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전쟁의 위험성과 같은 문제에 대한 많은 연구 결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오늘의 인도‧태평양 지역은 여러 차원과 여러 방식에서 기존의 미국의 헤게모니와 이 지역의 강국으로 등장한 중국 간의 경쟁이 현실로 나타나는 현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에 이 지역의 중간적 국가들이 대응하면서 나타나는 경향은 “이중의 위계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지역의 국제정치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냉전 시기 한국민은 국제정치 체제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했을까에 대해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다. 분단과 더불어 냉전하에서 살았던 한국민은 대체로 미국의 눈을 통해 바깥의 세계를 이해하고, 판단하고, 전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한국의 외교와 안보는 한미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냉전 시기를 통해 21세기 초 최근에 이르는 긴 시기 절대강자로서 세계 질서를 운영하고 유지해 왔던 미국 일국 지배 시대가 이제 이미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탈냉전 시기 국제정치 환경하에서 한 국민은 스스로 국제정치 환경과 조건을 냉정하게 이해해야 하고, 우리 앞에 등장한 새로운 국

제정치 질서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으로 내던져졌다. 그로 인해 한국은 이제 자체의 외교 능력과 안보 전략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국가의 국제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전략(statecraft)을 발전시켜야 할 어려운 과제를 떠안게 됐다.

오늘날 한국의 국내 정치는 통제되지 않은 의견, 갈등의 강도가 지극히 높은 이익의 분출, 제어되지 않은 열정과 가치들이 문지기(gatekeeping)없는 민주주의 제도 내로 폭발적으로 인풋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건강한 작동과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적 위기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 중요한 원인이자 결과는 국내 정치적 이슈, 이익 갈등 만이 아니라, 민족 문제를 둘러싼 이념 갈등의 확대 증폭 현상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진보‧보수 간 정치 양극화를 확대 심화하면서 갈등의 위험스러운 극대화를 통한 정치적‧사회적 균열의 심화 양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출현을 두려워하면서, 오늘날 탈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정치적 조건에서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다음 세 가지 문제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한국의 외교안보를 위한 정책 방향에 있어 북한과의 평화 지향적, 평화 공존적 정책 방향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외교안보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으면 한다.

둘째, 냉전 시기 한국 외교 관계의 중심축이던 미국과의 관계를 탈냉전 시기에서도 그대로 유지한다. 그와 동시에 일본과의 관계도 가장 중요한 인접 국가와의 관계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셋째, 국내의 이념 갈등을 완화하려는 노력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나, 민족 문제를 위한 정책에 있어서나 무엇보다 우선순위에 놓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 정치, 의회에서의 협력과 타협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또한 민족 문제를 위한 정책의 연속성을 위한 정치 제도와 규범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 경험적 사례로서 냉전 시기 독일이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했던 사례가 훌륭한 모델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북극 해빙 소멸 D-10년

카운트다운 시작됐다

포스텍 민승기 교수·김연희 연구교수 공동연구

국내 연구진이 북극 해빙의 소멸을 예측했다.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가 그 원인이다. 포스텍은 환경공학부 민승기 교수·김연희 연구교수 연구팀, 캐나다 환경기후변화청, 독일 함부르크대 연구팀이 공동으로 온실가스 배출 저감 노력과 상관없이 2030∼2050년대에 북극에 있는 해빙이 소멸될 수 있음을 연구를 통해 확인했다고 지난 7일 밝혔다. 이번 연구는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에 게재됐다.

온실가스 배출량이 현재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2030년대에 북극 해빙이 소멸되고,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더라도 2050년대에는 해빙이 모두 사라진다. 이는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평가보고서에서 해빙 소멸 시기로 예상한 2040년대보다 10년이나 더 빠른 예측이다. 해빙은 바닷물이 얼어서 생긴 얼음이다.

‘지구 온난화’라는 단어는 1988년 미국항공우

왼쪽부터 포스텍 환경공학부의 민승기 교수, 김연희 연구교수이다.

사진=포스텍

주국(NASA)의 기후과학자가 처음 사용하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여 북극에 있는 해빙의 면적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북극 해빙 감소는 북극의 온난화를 더욱 가속화시켜 중위도 지역에서 이상기후가 발생하는 빈도를 높이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연구팀은 북극 해빙의 소멸 시기를 예측하기 위해 먼저 1979년부터 2019년까지 지난 41년간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다중 모델 시뮬레이션 결과와 세 가지 위성 관측 데이터를 비교한 결과, 북극 해빙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인위적인 온실가스의 증가’로 확인됐다. 인간의 화석 연료 연소와 산림 벌채로 인해 방출된 온실가스가 지난 41년간의 북극 해빙 감소를 일으킨 반면, 에어로졸과 태양, 화산활동이 북극 해빙의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에어로졸은 공기 중에 부유하고 있는 작은 입자를 뜻한다. 또한 월별 분석을 통해 해빙의 면적이 가장 작은 시기는 9월이지만 늘어난 온실가스가 계절과 시기에 상관없이 북극 해빙 감소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민승기 교수는 “관측 데이터를 기반으로 모델 시뮬레이션을 보정해 준 결과 기존 IPCC 예측보다 더 빠른 북극 해빙 소멸 시기를 확인했다”라며, “탄소 중립 정책과 무관하게 북극 해빙이 사라질 수 있어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탄소 배출 저감 정책과 동시에 북극 해빙의 소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기후변화 영향을 평가하고 적응대책도 함께 마련해야 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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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피곤에 찌든 ‘피로대학’, 바실란도 정신으로 되살리자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대학에서 여유와 낭만이 사라져버렸다. 다들 힘들다. 마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대사처럼, 똑바로 읽어도 ‘다들 힘들다’이고, 거꾸로 읽어도 ‘다들 힘들다’이다. 대학 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대학끼리는 교육부의 사업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따내려고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교수끼리는 정년 트랙 대 비정년 트랙, 호봉제 대 연봉제, 교수회 대 교수노조 간의 대립과 갈등이 선을 넘었다. 학생끼리는 학점 경쟁부터 취업 경쟁까지 오직 경쟁뿐이다.

모두가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만 내달리고 있다. 모두 그렇게 열심히 매진하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고 늘 피곤하기만 할까?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현병철이 『피로사회』(2010)에서 현대를 성과주의가 초래한 피로사회라고 진단했다. 요즘 대학의 풍경이 바로 피곤에 찌든 피로대학 같다.

피로대학에서 잠시 탈출하는 방안으로 ‘바실란도’의 가치를 제안하고 싶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이 차를 몰고 1만6천킬로미터의 대륙일주에 나선 때는 1960년 9월이었다. 당시 58세로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혼자 떠나면 너무 심심

하겠다 싶어 프랑스산 푸들 ‘찰리’를 길벗으로 데려갔다. 넉 달 동안 34개 주를 돌아본 작가는 『찰리와 함께한 여행(Travels with Charley)』(1962)이란 여행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는 바실란도(Vacilando)라는 스페인어가 나온다. 코네티컷주에서 만난 어떤 상점 주인은 작가를 보며 부러워했다. “아아, 나도 갔으면 좋겠다!”, “왜 여기가 맘에 안 드십니까?”, “아닙니다. 여기도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가고 싶군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러세요?”, “그거야 상관 없습니다. 아무 데나 가고 싶어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구속받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가는 이런 마음을 바실란도라는 말로 설명했다. 바실란도란 대강의 방향은 정해져 있더라도 목적지에 도달하든 안 하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이다. 목적지에 다다르는 성과보다 여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드넓은 대륙을 횡단한 스타인벡은 마침내 고향인 캘리포니아주 몬테레이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서 자신이 한낱 이방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치듯 고향을 빠져나와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 후 그는 『분노의 포도』로 노벨문학상(1962)을 수상했다.

피로대학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대학인들이 많으리라. 교수나 학생이나 모두에게 바실란도를 권하고 싶다. 가려는 방향은 정해놓

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든 중간에 멈추든 크게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대학인들 역시 빈손으로 원점에 다시 돌아와도 좋다. 길을 떠난다고 해서 반드시 뭘 느끼고 뭔가를 얻고 돌아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바실란도란 단어 하나만 배낭에 넣고 당장 떠나보자. 목적지에 도착하는데 집착하지 말고 여정 자체를 즐겨보자. 작가의 옆에 애견 찰리가 있었듯이, 바실란도 여정에 함께할 친구가 곁에 있다면 더더욱 좋겠다.

대학에서 여유와 낭만이 사라져버렸다고 말하면 성과주의자들은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고 비판할 것이다. 과도한 성과주의로 인해 대학은 이미 뼛속까지 골병이 들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미국의 미네르바 스쿨 같은 대학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기존 대학의 틀을 깨고 미래의 대학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명성을 얻은 미네르바 스쿨 같은 대학 말이다.

교육부가 대학 정책을 좌우하는 마당에 우리나라 대학의 교수나 학생들은 스타인벡처럼 바실란도를 즐길 여유조차 없다. 대학이 정녕 이래도 되는지 짙은 회의감이 몰려온다면 한 번쯤 고물차를 몰고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숙소도 예약하지 말고 가다가 나타나는 곳에서 잠을 자고, 길섶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몸으로 두 눈으로 두 귀로 있는 그대로 느껴보기 바란다.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자신의 내면풍경을 지그시 바라보자. 지금의 대학 사회에 성과주의보다 바실란도 정신이 필요한 이유가 떠오를 것이다.

제공=갤러리 바톤

갤러리 초대석

김보희 개인전 「Towards」

'레오', 캔버스에 채색,162X130cm.

김보희 개인전 「Towards」가 갤러리 바톤에서 7월 1일까지 열린다. 호평 받았던 금호미술관(2020), 제주현대미술관(2022)에서의 개인전이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전시였다면, 이번 전시는 서귀포 스튜디오 주변의 자연, 반려견 등 작가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 신작들로 구성됐다.

푸르른 식물 사이 검은 래브라도 리트리버가 뒤를 돌아보고 있다. 작가의 레오를 향한 애정과 평온한 일상에서 오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이번 레오 연작은 총 4점으로, 근경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레오와 원경에서 제주도 풍경과 어울어진 레오의 모습이 담겼다. 반려견 레오가 각각 등장해 개별적인 서사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서로 이어진 풍경을 공유한다. ‘산수 병풍’의 전통적인 구도와 유사하면서도, 화려한 발색과 캔버스의 사용은 김보희식 풍경화의 매력으로 발산된다.

작가는 동서양 회화의 전통 양식을 분석하며, 동양화의 동시대적 확장성을 탐구했다. 김보희는 식물, 정원, 바다와 그 주변 풍경 등 일상에서 관찰되는 자연의 미와 순수함을 채색 수묵으로 섬세하게 표현한다. 서양화의 구도와 원근법을 수용하면서 묘사 대상의 생동감과 상호 간의 조화로움이 강조되는 동양화적 접근법의 유기적인 결합을 추구한다.

신다인 기자 shin@kyosu.net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서울에서 들은 “잘 들었다”는 인사말

지난 5월 13일, 흔들리는 고속버스를 타고 심란한 기분으로 서울로 향했다. 꼭두새벽부터 나온 탓에 좌석에 앉자마자 눈이 감겼지만 얼마 못 가 멀미에 잠을 깰 수밖에 없었다. 도착까지는 여전히 두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는데, 옆자리에 동행한 강사 선생님은 철학 강의 영상을 함께 듣자며 끼고 계시던 한쪽 이어폰을 내미셨다. 그러나 버스가 덜컹거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과 시위를 핑계로 4년 전에 찾았던 서울을 31년 인생에서 세 번째로 가는 날이었다. 철학 연구자로는 첫 상경이었다. 운 좋게 학문후속세대 발표를 맡게 되어 28개의 철학학회가 함께하는 한국철학자연합대회라는 성대한 축제의 한 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왜 나는 이 좋은 날 몸과 마음이 불안한 걸까. 그런 생각과 함께 버스 천장을 바라보며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돌이켜보면 사실 나는 이미 그 불안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나는 ‘연구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은연중에 늘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동년배의 수도권 연구자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 역시 달갑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가 가면 안 될 곳에 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1년 전 수업시간에 한 교수가 학계에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일로 “지방대 학력 세탁”을 운운했던 적이 있다. 물론, 그 교수님은 ‘인서울’ 대학 출신이었다. 당시 내가 모멸감을 느꼈던가? 떠올려보면 그때 기분이 나쁘긴 했으나 원래 막말을 자주 하는

교수니 그 정도는 참을 만하다고 생각하고 그 순간을 보내버렸다.

학력·성·계층·인종·장애 등에 대한 차별은 마치 미세먼지와도 같은 것이어서, 내가 그것을 늘 마시며 몸 안에 쌓여가고 있음을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은 법이다. 그럼에도 그 기억이 마치 스냅사진처럼 생생한 이유는, 내가 사후적으로 그것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규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수도권대학에 근무하면서 동시에 그 대학의 학력을 세탁해야 할 것으로 보는 모순적인,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인’ 그런 관점은 어찌 보면 연구자들 모두를 열등감으로 밀어 넣는 차별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고 공고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플로티누스(Plotinus)의 유명한 유출설처럼, 모든 학문적 자원과 자존감의 원천인 서울이라는 일자(the one)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연구자들은 그 존재 정도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처럼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흐릿한, ‘지방대’ 연구자를 다시 생생하게 만든 것은 반동적인 의식이 아닌 구체적인 체험이었다. 그날, 떨리는 학문후속세대 발표 이후 한 이름 모를 연구자가 “잘 들었다”는 인사말과 함께 내게 웃어 보였고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 웃음을 돌려주었다. 먼 길을 나와 함께 해준 동료들의 응원과 교수님들의 격려도 한 몸에 받았고, 다른 발표를 들으면서 누군가의 열정에 공명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한국여성철학회에 참석한 강렬한 경험

도 잊기 힘들 것이다. 내가 가진 학문적 관심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앞서 그것을 연구해왔던 선배 연구자들이 이만큼이나 모여있다니! 그때 느꼈던 잔잔한 벅차오름은 아무리 뒤늦게 냉소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이후 내가 깨달은 한가지는, 지방대생이라는 꼬리표가 나 자신과 나의 연구, 내가 소속된 대학과 학문공동체를 이루는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은 연구자로서 나의 삶과 활동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과 체험이 가능해지려면, 최소한 비수도권의 학문공동체가 유지되어야 하며 연구자들이 생존문제나 좌절 때문에 연구를 그만두지 않을 정도의 지원과 정보, 자원이 비수도권대학에도 충분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환경이 갖추어져야만 비로소 비수도권대학의 연구자들은 그들의 삶을 이루는 현실적이고 특수한 지역적, 사회적 조건들을 바탕으로 기존 연구들과 확실

하게 차별화되는, 민감하고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정주혜

경상국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경상국립대 철학과에서 「라캉의 실재개념에 대한 비판적 독해 -주디스 버틀러의 ‘담론의 구성적 외부’ 개념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페미니즘과 비거니즘, 동물권 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 젠더폭력조사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고

‘퀀트’와 ‘퀄’ 사이에서 성찰하기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면서 모바일 환경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제 SNS 알고리즘은 필자의 행동 패턴을 인식해서 ‘대학원생이라면 알아야 할 것들’을 필자에게 수시로 보여준다. 직접 찾아보지 않아도 유용한 정보를 알아서 제공해주니 고마운 일이다. 그중에서도 연구방법론과 관련한 광고나 게시물을 훑어보고 있으면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R과 Python을 이용한 빅데이터 통계 분석’, ‘회귀분석부터 구조방정식까지 하루에 마스터 하기’ 등과 같은 양적 연구방법론 특강의 홍보다. 회당 수십만 원의 수강료는 예사다. 그마저도 몇십 퍼센트 할인된 가격이라는 선심성 문구도 함께 말이다. 주로 미국대학에서 고급스러운 기법을 배워와서 국내 유명 대학에 출강한다는 강사진의 화려한 프로필도 눈길을 끈다.

OO대학 통계학과 A교수님께서 ‘빅데이터’라는 유행어의 허상을 지적하며 개탄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있다. 최근에 출판된 서적에서 ‘4차 산업혁명’을 내세워 교육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장사꾼이라는 다소 과격한 진단을 내린 XX대학 사회학과 B교수의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데이터의 시대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의 데이터는 주로 ‘정량적 데이터’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대학원도 ‘양적 느낌’으로 충만하다.

대학원 진학 후에 수강했던 연구방법론 관련 수업은 ‘퀀트’가 연구방법론을 압도하는 힘을 잘 보여주었다. 담당 교수님은 본인이 양적 연구자임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고, 수업 중 이따금 “자세한 것은 방학 때 열리는 양적 연구 워크숍을 들으면 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물론 워크숍의 하루 수강료가 SNS의 광고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수십만 원이라는 사실은 애써 밝히지 않으셨지만 말이다. 이 수업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한 학생은, HLM, EFA/CFA, LCA/LTA와 같은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마치 고급 통계를 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또래 압력’을 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의 기세등등함이 느껴졌다. 질적 연구를 통해서도 연구자로서의 진정한 역량과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 수업을 수강하는 한 학기 동안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분야와 시기마다 연구방법론이 활용되는 양상은 다를 것이다. 다만 필자가 전공하는 교육행정학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실증주의

와 구성주의에 대한 이분법적 배타성과 학계에 만연한 ‘양적’ vs ‘질적’ 연구 방법의 이원론적 해석과 적용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사회과학을 자연과학과 동일시하면서 보편 이론을 추구하는 실증주의를 양적 데이터와 고급 통계기법을 활용한 연구방법론과 연결 짓는 한편, 행위자와 구성원의 다양한시각과 해석을 중요시하는 해석주의와 질적 연구 방법을 기계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두 가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의 상호 보완적인 기능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는 문제의식이 드러나고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관점은 간혹 불가공약성(incommensurability) 의미를 잘못 해석하게 만든다.

일찍이 폴 파이어밴드와 토마스 쿤이 주창했던 불가공약성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은 공통된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이는 특정 시대와 사회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과학적인 표준에 관한 것으로, 패러다임 간의 상호비교나 평가가 명확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불가공약성은 각기 다른 패러다임을 하나의 잣대로 측정·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 특정 패러다임의 우월성을 증명하거나 또는 상보적인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퀀트’와 ‘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단순한 상호 배타성을 넘어, 실증적 방법론이 해석주의적 관점보다 과학적이고, 따라서 우월하다는 그릇된 인식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유의해야 함은 물론이다.

필자가 알고 지내던 국내 굴지의 연구중심대학 물리학과 C교수는 양적연구방법의 금언이라 할 수 있는 ‘유의수준 0.05’에 대해 “말장난 같은데요”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퀀트의 정신과 유용성을 존중하고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높은 수준의 양적연구방법 숙련도를 갖추고 싶은 필자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학문후속세대 연구자로서 ‘양(量)방’과 ‘질(質)방’의 우열을 가리는 능력이 아니라, ‘나는 연구자로서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를 가슴에 담고, 둘 사이에서 부단히 성찰을 이어가려는 자

세를 갖추어야 함을 매일 되새겨 본다.

김규석

고려대 교육학과 박사과정

고려대 교육학과 교육행정/고등교육 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0년부터 성균관대 국제처 등의 부서를 거치며 고등교육 국제화 분야에서 주로 경력을 쌓았다. 2017년부터 한국뉴욕주립대에서 전략기획팀장과 입학팀장으로 근무했다.

김상돈의 교수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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